[동아일보] 숨 쉴 땅 한 자락 없었어도 나라는 있었다[기고/이종찬]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3.09.18

“국토 없으면 국가도 아니다”는 식민지배 정당화 논리
이승만 초대 내각도 일제강점기 ‘국가’ 존재 인식
정부는 일시 없었어도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永續
일전에 고려대 총장을 지낸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선생의 탄신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한다기에 참석했다. 김 총장께서 광복군으로 활약한 1944∼1945년. 미국의 OSS와 합동으로 국내 침투 훈련, 게릴라 빨치산 훈련을 받는 사진 여러 장도 봤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독립군을 당시 빨치산으로 불렀다. 군복 입고 기관단총을 든 사진이 멋있었다. 나는 주최 측에 물었다. “만약 해방이 안 되었으면 김 총장이 어떤 임무로 국내에 침투했을까요?” 그분은 “강원도에 침투하라는 임무를 받았답니다. 그곳에 낙하산으로 내리면 현지에서 활동영역을 넓혀 교두보를 만드는 임무였었다고요.” 그 순간 나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 또는 영화에서 보는 나발론 요새를 파괴하는 그런 임무와 비슷했을 거라고 느끼고 광복군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동아일보 9월 6일자 송평인 칼럼에서 송 위원은 “독립군이 맘 놓고 숨 쉴 땅 한 자락이 없었는데도 이종찬 광복회장은 나라를 잃은 적이 없고”라면서 필자를 비판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일제가 점령한 땅은 모두 일본 땅이지 왜 우리 땅인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땅 한 자락도 없으니 나라도 없는 게 아니냐?’ ‘나라도 없는데 무슨 독립운동이냐?’

1948년 건국론자들은 언제나 “국토가 없으면 국가도 아니다”라는 매우 편협하고 잘못된 생각에 박혀 있다. 나라가 강점당하면 그 순간 국가는 역사에서 소멸된다고 보고 있다. 일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족속들의 생각이다. 김 총장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생각이다.

김 총장은 학병으로 일제에 끌려 나갔지만 탈출해서 광복군에 들어갔다. 지옥훈련이나 다름없는 국내 침투훈련을 통해 내 나라, 내 땅을 찾고자 투쟁했던 김 총장. 건국론자들의 생각 자체가 김 총장과는 너무나 다른 삶의 태도인지라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하다.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독재자에게 저항하기 위해 세계의 지성들이 자진 가담해 싸웠다. 세계의 지성들은 자유민주주의가 파시즘에 의해 무너진다는 사실에 저항한 것이다. 송 위원의 말대로라면 “숨 쉴 땅도 없는 놈들이 왜 남의 나라에 와서 법석을 떨까” 혀를 찼을 것이다.

송 위원은 또 필자의 광복절 기념사를 문제 삼았다. 기념사 가운데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고 흥망은 있어도, 민족의 역사는 끊기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일시 없어도, 나라는 있었습니다”라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건국이란 말은 적당치 않다는 기념사의 뜻을 “건국이 뭔 말이냐는 헛소리를 광복절 기념사에서 늘어놓았다”고 비아냥거렸다. 그것도 홍범도를 한참 이야기하다 난데없이 나를 끌어들이면서 말이다. 이미 여러 차례 필자는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재삼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 가지 사례만 들겠다.

1948년 12월 국적법을 심의하는 국회. 의원들이 “국적법을 오늘 심의하는데 이 법이 통과되기 이전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의 국적은 어딘가요” 물었다. 당시 이인 법무부 장관은 단호하게 답변했다. “당연히 한국 국적이죠. 나라는 있었습니다. 정부가 없었을 뿐이죠. 나라가 있는데 정부가 없는 경우는 많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 이승만 대통령부터 각 부 장관까지 “나라는 있었다. 단지 일제가 강점해서 주권 행사를 못 했을 뿐이다. 이제 주권 행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 정식 정부를 세운 과정에 있다”고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지금도 대한민국 정부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일본 정부에 대해 조선왕조나 대한제국 시대 일본과 불법적으로 체결된 모든 조약을 왜 무효라 하는가?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영속돼 왔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다. 만약 대한제국이 소멸되었고 대한민국이 1948년 신생국으로 새로 건국되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대한제국에서 강제로 체결된 일본의 불법적인 조약체결을 무효라 할 수 있는가? 한일기본조약 제2조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란 표현에서 우리는 일관되게 ‘이미 무효’란 ‘원초적 무효’라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1945년부터 무효’라는 반론을 펴고 있다. 만약 1948년 건국론자들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일본의 주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45년 일제강점기를 합법화시키게 된다. 일제강점기 우리 광복회원은 지긋지긋한 일제 총독부 통치라 저주하고 있는 데 반해 뉴라이트들은 매우 행복한 시기로 느끼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