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독립운동가

04월의 독립운동가

유기동 / 김만수 / 최병호(1891~1924/1892~1924/1903~1924)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독립장/독립장서훈년도 :1963/1963/1963

1920년대 흥업단에 가담하여 항일무장 활동

1924년 참의부원으로 형사부장 등 10여명을 사살하고 동지들과 현장에서 순국

1919년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활동

1924년 참의부원으로 형사부장 등 10여명을 사살하고 동지들과 현장에서 순국

1921년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헌병으로 활동

1924년 참의부원으로 형사부장 등 10여명을 사살하고 동지들과 현장에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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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총영사관 의거 100주년을 맞아 일본 고등경찰 간부를 사살하는 등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유기동(1963년 독립장), 김만수(1963년 독립장), 최병호(1963년 독립장) 선생을 ‘2024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한국의 국권이 상실된 1910년 이후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척박한 환경과 생활 여건의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해 나가고, 미래의 독립전사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노력은 3・1운동 이후부터 큰 성과로 이어져 독립군의 청산리대첩과 같은 독립전쟁 승리나 단체・개인이 감행하는 의열투쟁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1924년 4월 유기동 선생 등 세 청년의 하얼빈 총영사관 의거는 대표적인 의열투쟁의 사례로 알려졌다.

 

경북 안동 출생(1891년)인 유기동 선생은 일찍부터 만주로 건너가 흥업단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 안동 출생(1892년)인 김만수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농사와 군사훈련을 병행하며 독립의지를 다짐, 

1920년 서로군정서에 합류하여 군자금 징수 활동을 전개했으며, 한족회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경북 울진 출생(1903년)인 최병호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의 헌병대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김만수・최병호 선생은 하얼빈 총영사관의 고등경찰 간부 쿠니요시와 형사부장 마쓰시마가 하얼빈 일대의 한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함부로 해친다는 소문이 돌자, 하얼빈 지역에서 친일파와 일본 경찰을 암살하며 일제 기관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은신하던 중 예전의 동지 유기동 선생 우연히 만나 함께 의열 활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거사가 실행되기 전에 은신처가 발각되어 다수의 적에게 포위되자 격렬한 항전 끝에 일본 경찰 쿠니요시 세이호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을 비롯한 중국군과 밤새도록 교전을 벌이다 1924년 4월 8일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유기동·김만수·최병호 세 청년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용맹하게 맞서며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세 청년의 의거는 만주 무장독립운동 진영에 큰 교훈을 주었고, 1924년 6월 이후 독립군단들이 통합되면서 항일무장투쟁이 강화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정부는 유기동·김만수·최병호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 각각 추서하였다.

 

유기동 / 김만수 / 최병호

유기동 , (1891) ~(1924) , 독립장 (1963)김만수 , 1892 ~(1924) , 독립장 (1963)최병호 , (1903) ~(1924) , 독립장 (1963)

1. 1920년대 전반기 만주의 독립운동 상황

현재의 중국 동북 3성 즉 만주지역은 일찍부터 항일독립운동의 시작지였고, 거의 30년 동안 주요 무대였다.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인한 국망의 치욕을 겪은 1910년 이래로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만주로 속속 망명하여 터를 잡았다. 그들은 척박한 풍토조건과 생활상의 갖가지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이주농민들과 함께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해갔다. 그런 속에서 단체를 조직하여 동포를 모으고 학교를 세워 미래의 독립전사들을 계속해 길러냈다.

그 활동은 1919년의 3.1운동 직후부터 빛을 발하여 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무장독립운동의 발흥이 그것으로, 크고 작은 항일조직과 독립군 부대들이 동·남·북만주 각지에서 등장하고 저마다의 몫과 방식대로 활약하면서 독립전쟁의 기운을 북돋아갔다. 특히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쟁에서 우리 독립군이 거둔 대승은 무장독립운동의 앞길을 훤히 틔워주는 횃불과도 같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과 잔악한 보복(‘경신참변’) 때문에 역량 보존을 위한 독립군조직들의 근거지 이동이 불가피해졌다. 북방 밀산(密山)에서의 독립군단 집결과 아무르강 건너 시베리아방면으로의 대이동은 그 때문이었는데, 1921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 후 독립군단은 만주로 되돌아가 재정착하였다.

그 후, 개별 독립군조직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무장독립운동 전체의 역량 결집을 꾀하는 ‘군사통일’의 노력이 먼저 시도되었다. 그 결과, 남만주에서는 1922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거쳐 대한통의부(統義府)가 민정까지 겸하는 중심조직으로 성립하였다. 그런데 그 내부에서 왕조회귀의 ‘복벽’ 노선과 임시정부 절대 옹호의 ‘민국’ 노선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끝에 각각 대한의군부(義軍府, 1923. 2)와 참의부(參議府, 1924. 6 ;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통의부 잔류파는 남만주 북부의 다른 군소단체들을 규합하여 임시정부와는 상당 정도 거리를 두는 입장의 정의부(正義府, 1924. 11)를 새로이 발족시킨다. 북만주에서도 대한독립군단 결성(1922.8)과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재건(1924. 3) 등의 통합 움직임을 거쳐서 1925년 3월 영안현에서 신민부(新民府)가 건립된다.

그렇지만 만주가 무장독립운동이 용이한 공간은 아니였다. 정치적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서·북간도의 요처마다 도사리고 있으면서 거류 한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끈을 조여만 오는 일본영사관과 예하 경찰, 상시로 그들의 수족이 되어주는 조선인민회·보민회 등의 친일조직 및 밀정들 등은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부딪쳐야만 하는 ‘적’이었다. 일제의 위협·압박·회유 등에 수세적으로 대응했던 장쭤린(張作霖) 군벌정권과 휘하 기관들의 부당한 요구 또는 간섭에도 독립운동가들은 적절히 대처해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암중모색의 고투를 거듭하면서도 독립운동진영은 종종 적극적 응전과 준비된 행동 태세를 보여주곤 했다. 독립군조직들의 게릴라성 전투 활동이나 단체원 혹은 개인이 감행하는 결사적 의열 활동이 그것이다. 전자는 주로 참의부 대원들이 압록강 연변의 국경지대에서 감행하는 일본경찰대 및 초소 기습으로, 후자는 불시에 벌어지는 일경 혹은 친일배·밀정 암살·처단 등의 사건으로 표면화하였다. 이제 꼭 100주년이 되는 1924년 4월 김만수 등 세 청년의 하얼빈 의거는 후자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만하다.

2. 1924년 3의사의 하얼빈 혈전 의거

1) 1924년 4월 초순의 하얼빈 총격사건

1924년 4월 6일, 하얼빈 외곽의 여관 동발잔(同發棧)에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의 고등정탐부장 쿠니요시 세이호(國吉精保)가 정복경관 3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투숙 중인 청년 2명을 다짜고짜 붙잡아갔다. 잡혀간 두 사람은 일찍부터 대한군정서(별칭‘북로군정서’)의 재무부 모연국장(募捐局長)이었으면서 특설기관인 청년모험대의 대장도 겸임했던 이홍래(李鴻來)와 휘하 소대장 강승경(姜承慶; 이명 강기무·강민선)이었다. 이홍래가 다른 4인의 청년과 함께 얼마 전 하얼빈으로 들어와 은신, 활동 중인 사실이 밀정 김모의 보고로 탐지되었던 것이다.

다른 청년 3인이 근처 부가전(傅家甸)에 따로 집을 빌려 숨어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야마우치 시로오(山內四郞) 총영사가 검거령을 내렸다. 이에 쿠니요시가 휘하 경관 3인을 데리고 즉시 출동했다. 청년 3명이 무장한 것을 알게된 그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중국 경찰서장에게 협조를 구하였다. 서장은 즉각 경찰청장에게 보고했고, 청장이 하얼빈도 교섭서(交涉署)의 교섭원 차이윈셩(蔡運升)에게 통보했다. 이에 차이는 빈강진수사(濱江鎭守使) 장자오탕(張召棠)에게 연락해, 군사를 보내 일본영사관 측에 협조하도록 권유했다. 장자오탕은 군사책임자인 입장에서 일단 응수하기를 “만일 한국독립군이면 국사범(國事犯) 선례에 비추어 보호해 줄 일이지, 일본인을 도와 잡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차이윈셩은 “어떤 유의 범죄든 간에 마땅히 일본영사를 도와서 잡아주고 교섭을 면함이 옳다.”면서 강박하였다. 결국은 장자오탕이 자기주장을 접고 보병·기병 각 1개 중대를 지원했다. 경찰청에서도 특경대장 장젠둥(張鎭東)과 2개 경찰서의 서장이 20명씩의 순경을 데리고 나타나 여관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 상태에서 장젠둥이 집안으로 들어가 손전등을 비춰보니 청년 3인이 태연히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장이 먼저 “어디서 왔으며, 무얼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 3인은 서슴없이 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조국이 망한 지 오래되었고, 우리 인민이 홍수와 화마에 깊이 빠져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우리가 독립군을 조직하여 전적으로 복국운동을 행하며 왜적과 승부를 겨룰 뿐이다. 우리가 여기로 온 것은 모종의 임무가 있어서인데, 비밀이므로 밝혀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살인・강도짓 하는 토비(土匪)는 결코 아니며, 또한 정중히 밝혀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중국은 우리와 가까이해 온 역사가 깊고 중국인들에게는 털끝만큼도 악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결코 상해를 가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더라도 만일 일본인이 온다면 그때는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세 청년이 한국독립군임을 확실히 인지한 장젠둥은 “그 말과 같다면 여러분은 다 국사범이라, 조용히 잡혀주면 우리가 국사범으로 대우할 것이요, 결코 일본에 인도하지 않겠으니, 어떠한가?”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3인은 “여러분은 그냥 물러가고 부디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여 달라”고 대답하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렇게 대화가 끝나가던 참에 쿠니요시가 갑자기 중국경찰의 전등을 빼앗아 들고 권총을 겨누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안에서 즉각 권총이 발사되었고, 가슴을 관통당한 쿠니요시가 거꾸러져 즉사했다. 몹시 당황한 일본 총영사는 1인당 현상금 3백 원을 내걸고 중국 군경에게 체포를 강력히 요구했다. 진수사도 그와 같이 독려하므로 철통같은 포위망 속에서 한밤중에도 총탄 5백여 발이 난사되었다. 그렇지만 기와와 벽이 워낙 견고하여 바로 무너지진 않았고, 안에서도 간간이 권총 응사가 있었다.

그런 대치상태와 공방전이 날이 밝은 후에도 계속되다가 어느 때부터 집안이 조용해진 듯했다. 이에 중국경찰이 얼른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부수고 구멍을 냈다. 그 사이로 수류탄 대여섯 개를 던져넣어 폭발시킴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탄을 퍼부었다. 그러자 마침내 외벽이 무너지고 경찰이 한꺼번에 내부로 진입했다.

안에서는 청년 3인 모두 바닥에 엎어진 자세로 죽어있었다. 처참한 형상의 시신 주위로 유혈이 낭자했고, 권총 2정에 실탄 3발, 수첩 1권이 남아있었다. 3인 모두 가슴 한가운데에 총탄 자국이 있어 자결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장렬한 전사로 순국한 것이었다. 이때가 4월 9일 오후 2시경이었다는 후일의 명시적 기록이 하나 있는 반면에, 조선총독부 보도자료와 현지취재 내용이 섞였을 바 당시의 국내신문 기사들에서는 하나같이 4월 7일 자정부터 8일 낮 동안의 일이었던 것처럼 보도되었다.

투항보다 죽음이 영광(신한민보 1924년 5월 15일자)
투항보다 죽음이 영광(신한민보 1924년 5월 15일자)

2) 3의사의 신원과 생전 활동행보들

시신 셋 중의 한 사람은 왼쪽 팔뚝과 다리에 먹으로 이름과 생년이 새겨져 있었다. 31세, ‘김만수(金萬秀)’였다. 다른 두 사람은 ‘유기동(柳基東)’과 ‘왕국심(王國深)’이라는 명함을 각자 지니고 있었다.

김만수는 1892년 음력 12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고, 1913년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로 이동했다. 그 후 여러 곳을 돌아보며 다니다 1918년 안동 출신 독립지사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주도로 길림성 남부의 화전현에 설립된 길남장(吉南庄)으로 들어갔다. 길남장은 20세 이상의 장정을 모집해 농병(農兵)으로 삼아서 반나절은 농사짓고 반나절은 군사훈련을 받게끔 하는 둔전 형태의 병영이었다.

이상룡은 그 시절의 김만수를 “키는 작으나 꼼꼼하고 날쌨으며 인내심 많은 이”로 기억했다. 또한 병서를 좀 읽었다고 아는 체하기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잘 죽일 수 있어야 진짜 군인이라고 강조한 점도 특별히 기억되었다. 입소 몇 달 후에 길남장을 떠나갔던 김만수는 1920년 화전현에 본부를 두고 임시정부 승인 하의 무장단체가 된 서로군정서로 찾아가 합류했다. 그리고는 주민 상대의 군자금 징수 활동에 종사하다 1922년 헌병대가 신설되니 그 대원으로 충원되었다.

왕국심의 본명은 사후 확인되기로 최병호(崔炳鎬)였다. 1903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부모와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봉천성 동남쪽 통화현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3.1운동 발발 후 집을 떠나 북만주로 가서 중동선(中東線) 철로 일대를 돌아보고 길림성의 왕청현과 영안현 사이에 머물렀다. 이곳은 북로군정서의 근거지 부근으로, 그도 ‘군정서 대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상룡이 쓴 전기문에는 최병호가 김만수와 함께 남만주의 ‘서로군정서’로 들어와 헌병대에 편입했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그가 이홍래와 동행했고 더욱이 서로군정서 구역도 아닌 북만주의 하얼빈으로 간 점으로 보면, 적어도 1924년 당시의 두 사람은 이홍래 주도의 청년모험대(‘건국청년모험단’으로 일컫기도 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재건된 북로군정서로 소속이 바뀌었거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룡의 전기문에서 언급된 ‘북진군 응소’가 1921년 독립군단의 러시아행 대이동 때 서로군정서 부대도 이청천(李靑天)의 지휘하에 호응 북행하여 이동 대오에 합류했던 사실을 압축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이 하얼빈으로 들어간 때는 그곳 총영사관의 고등경찰 간부 쿠니요시와 형사부장 마쓰시마(松島)가 장춘과 하얼빈 일대의 한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며 함부로 해친다고 악명이 높던 1923년 음력 12월 초(양력으로는 1924년 1월 초순)이었다. 그들은 하얼빈에 은신해 있으면서 “적견배(敵犬輩)와 간부(奸富, 군자금 의연에 매우 비협조적인 부자들), 적경(敵警)을 암살하며 적의 소유건물 등을 파괴하려는 계획” 아래 거사 기회를 엿보던 중의 어느 봄날, 예전의 동지 유기동과 우연히 마주쳤다.

1891년생(추정)인 유기동 또한 김만수처럼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찍부터 만주로 건너왔다. 1920년 봉천성 무송현에서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단체로 흥업단(興業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2년 화전현으로 이주해갔을 때 김만수와 알게 되어 교류했는데, 1923년 취원창에 가 있다가 1924년 3월 하얼빈의 부가전으로 옮겨가 있던 중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은 밤늦도록 깊은 얘기를 나누었고, 유기동도 흔쾌히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부가전 사건의 세사람은 화장(동아일보 1924년 4월 15일자)ⓒ국사편찬위원회
부가전 사건의 세사람은 화장(동아일보 1924년 4월 15일자)ⓒ국사편찬위원회

거사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불행히도 은신처가 탄로 나버렸고, 일본영사관의 압력과 재촉을 물리치지 못한 중국 지방정부 외교·군사·경무 당국자들의 진압으로 세 사람은 군경의 집중공격을 받아 순국하고 말았다.

3의사의 시신은 일단 경찰이 수습한 다음 하얼빈 중구(中區) 십자회(十字會)에서 염하고 한인 공동묘지에 매장해 주었다. 묘소는 이후에도 참배객들로 붐볐고, 모두가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그 장렬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3. 하얼빈 의거의 반향과 의의

이 사건은 하얼빈 현지와 국내 신문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원흉을 단총 한 방으로 응징·처단했다는 점에서 꼭 25년 전 같은 지역에서 벌어졌던 안중근 의거를 방불케 하는 사건이었다.

하얼빈의 사회단체들은 일본 측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엄연히 중국 경내인 곳에서 일본영사관이 ‘국사범’인 한인 독립운동자를 ‘토비’로 모함하고 멋대로 체포해 가려다 상황이 불리하니 중국 군경이 대신 진압하도록 사주한 것으로, 이는 국제공법에 위배되며 주권침해까지 더해진 행동으로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섭서가 일본영사관에 엄중히 항의할 것을 단체연합회 명의로 요구하였다. 이에 길림성장은 진수사를 질책하며, “죄명이 분명치 않은데도 외국인이 요청한다고 함부로 군사를 내어 영내의 사람을 대신 체포한 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다. 이후로는 모든 정치적 범죄와 관련해 재만 한인에 대해 [일본 측이] 강을 건너와 체포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한편으로는, 계획이 치밀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안타깝게 여기거나, 적경 한 명 없앤다고 독립군 의사를 세 명이나 잃게 된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상룡은 “이는 생과 사를 넘어서는 세 분의 마음을 모르는 일이다. 이 세 사람은 독립이 속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해 되는 것을 없애어 민족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독립을 미리 준비해가도록 살신성인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의(義)란 마땅함[의(宜)]이기도 하다. 마땅히 없애야 할 것을 없앴다면 그 공로를 따지지 않으며, 마땅히 죽어야 할 곳이라면 죽더라도 그 뜻을 바꾸지 않는 것, 이것이 의사일 것이다”라고 추기하여, 쿠니요시를 단번에 처단한 공적과 항복하지 않고 순국한 의기(義氣)를 칭찬하였다.

독립군의 유기동·김만수·최병호 세 용사는 일제에 추호도 굴복함이 없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용감무쌍하게 맞서며 일신을 민족 독립과 자유의 제단에 바쳤다. 이상룡의 말처럼 실로 ‘살신성인’의 길을 택해 걸어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집단적・조직적 수준의 무장투쟁 이상으로, 개인적 결단과 남다른 용기로 자기희생을 불사하고 껴안은 일대 의거(義擧)였다. 그래서 의열투쟁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진정한 의사의 길을 걸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서 1920년부터 남만주에서 성립해 맹렬히 활동하던 벽창의용단(碧昌義勇團)·의성단(義成團) 등의 의열투쟁 단체들과 더불어 하얼빈 3의사의 의거도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진영에 큰 자극과 교훈을 남겼다. 한동안 흐트러졌던 전열을 재정비하고 자세를 가다듬은 독립운동가들과 조직들이 1924년 6월 이후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연이어 발족시켜 무장독립운동의 새 국면을 열어가게 된 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3의사가 한날한시에 수행해낸 의로운 혈전의 공훈과 그 의의를 기리고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