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독립운동가

03월의 독립운동가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 이사벨라 멘지스 데이지호킹(1887 ~1963/1856 ~1935/1888 ~1971)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건국포장/건국포장서훈년도 :2022/2022/2022

1919년 부산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학생 인솔 및 보호

1940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

1895년 부산 일신여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의 자유·평등·주체의식 고양

1919년 3.1만세운동 준비 및 참여학생 보호

1919년 부산 일신여학교 교원으로 3.1만세운동 당시 학생 지휘

1919년 국기 제작 및 만세운동 증거 소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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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센더먼 데이비스 / 이사벨라 멘지스 / 데이지 호킹

마가렛 센더먼 데이비스 , 1887 ~1963 , 애족장 (2022)이사벨라 멘지스 , 1856 ~1935 , 건국포장 (2022)데이지 호킹 , 1888 ~1971 , 건국포장 (2022)20

1. 일신여학교의 3.1운동

1919년 3월 2~3일경, 서울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기독교계통의 인사들을 통하여 부산·마산 지역에도 전달되었다. 이 무렵 서울에서 파견된 학생대표들도 부산에 내려와 부산상업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들을 만나 서울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알리고 만세시위를 촉구하였다.

독립선언서가 부산에 전달되자, 1917년 3월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주경애(朱敬愛)는, 1918년 7월 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있던 동료 박시연(朴時淵)에게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개시되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거행하자’고 하여 3월 11일 저녁에 시위를 계획하고,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들과 함께 준비에 착수했다. 거사 하루 전인 3월 10일 밤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 11명이 기숙사에 모여 태극기 50여장을 만들었다.

「부산진 여학교 묘령의 학생 열명이 기소됨」(매일신보 1919년 4월 7일자)
「부산진 여학교 묘령의 학생 열명이 기소됨」(매일신보 1919년 4월 7일자)

3월 11일 수업을 마친 후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 저녁 9시경, 김응수(金應守)·김난줄(金蘭茁)·김반수(金班守)·김복선(金福善)·김봉애(金奉愛)·박정수(朴貞守)·송명진(宋明進)·심순의(沈順伊)·이명시(李明施) 등이 교사 주경애·박시연과 함께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좌천동 일대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이에 호응한 군중 수 백명이 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시위를 저지하고 주동자들을 체포함으로써 시위는 2시간여 만에 해산되었다.

이 시위에서 체포된 주동자들은 기소되어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교사 박시은 등은 징역 2년, 학생 김응수·김난줄·김반수 등 9명은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 마가렛 데이비스와 3.1운동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독립기념관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독립기념관

마가렛 데이비스는 1887년 1월 12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알란스포드(Allansford)에서 태어났다. 멜버른의 장로회여자대학(Presbyterian Ladies College)을 졸업하고, 이어서 멜버른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하고 부속 사범과에서 2년간 수학한 뒤, 1910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7년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디커니스훈련소(Deaconese Institute)를 마치고, 그해 10월 20일 호주장로회 여선교사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Victoria)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내한했다. 내한 직후 호주장로회에서 운영하던 부산진 일신(日新)여학교 교무주임을 맡았고, 1914년부터 교장을 맡았다. 1915년 교장직을 일시 사임했으나, 1916년 재차 취임하여 1921년까지 학교의 교육행정 전반을 책임졌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데이비스는 교장으로서 일신여학교에서도 같은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교사들과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에게 교칙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경고했다. 그럼에도 3월 11일 저녁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같은 학교에 교사로 있던 여선교사 호킹과 함께 학생들을 귀가시키기 위하여 찾아 나섰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나 귀가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와 20분쯤 되었을 때 집으로 찾아온 6명의 순경들에게 체포되어 부산경찰서에 구금·취조를 받았다.

12일 취조시 받은 질문은 학생들의 출석부가 어디 있느냐는 것과 학생들이 만든 태극기의 존재를 알았느냐는 두 가지였다. 출석부는 집에 있다고 답하여 압수당했고, 태극기의 존재는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13일 취조를 담당했던 심문관은 데이비스의 집에서 태극기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주고, “일본과 영국의 동맹관계의 견지에서 이런 종류의 사건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서장의 면담이 있은 후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면담에서 서장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했지만, 데이비스는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다음 날인 3월 14일에도 멘지스와 호킹과의 대조 심문을 위해 법정에 불려가 심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15일 오후에도 부산진파출소에 소환되어 관리들과 약 12명의 헌병경찰에게 둘러싸여 약 1시간 동안 3월 11일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데이비스는 1919년 3월 17일 “부산진과 부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진술서(3월 11일 밤부터 3월 15일 저녁까지)”를 작성하여 이 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호주 장로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받는 학교를 경영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데이비스는 1940년까지 동래에서 일신여학교 교장과 교육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정년 은퇴로 귀국하였다. 1963년 6월 빅토리아주 딥딘(Deepdene)에서 76세로 별세하였다.

3. 이사벨라 멘지스와 3.1운동

이사벨라 멘지스ⓒ독립기념관
이사벨라 멘지스ⓒ독립기념관

이사벨라 멘지스는 1856년 7월 30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의 발라랏(Ballarat)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 지역의 성앤드류스교회(St. Andrew's Church)에 출석하였으며, 엘라드 스트릿 공립학교를 거쳐 사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후 발라랏의 에벤에셀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와 호주장로회 여전도회연합회 에벤에셀 지부 총무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 여전도회연합회에서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1891년 9월 메리 퍼셋(Miss Mary Fawcett), 진 페리(Miss Jean Perry) 선교사 등과 함께 부산 지역에 파견되었다. 배로 일본을 거쳐 1891년 10월 12일 부산에 도착한 멘지스 선교사 일행은 초기에는 일본인 거류지와 의료 선교사 하디의 집에 거주하면서 심상현(沈相炫)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다가 1893년 부산진 좌천동에 한국인 집 한 채를 구입하여 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멘지스 선교사를 비롯한 호주 여선교사들의 사역은 주로 어린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복음전도와 성경공부를 시키는 것이었다. 멘지스는 버려진 아이들과 고아들을 모아 1893년 이 지역 최초의 고아원인 미오라고아원을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1895년에 고아들을 모아 설립한 여학교는 후일 이 지역 여성교육의 명문인 일신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녀는 건강과 가정 사정으로 190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으나, 1912년 다시 내한하여, 1924년 은퇴하기까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부산 지역의 복음 전도와 교육사업, 자선사업에 헌신하였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던 무렵 멘지스는 일신여학교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기숙사 학생들이 부산지역 3.1운동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이를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3월 10일 밤 태극기를 만들 때 깃대를 제공해주었을뿐만 아니라 그들이 만든 태극기와 제작 도구를 보관해 주었다. 3월 11일 저녁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키자 이들을 보호했다. 교장 데이비스와 교사 호킹이 학생들을 찾아 나서면서 멘지스는 기숙사를 지키며 학생들을 보호했다. 주동 학생들이 체포된 후 그들의 증언에 따라 멘지스도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기숙사는 수색을 당하여 태극기와 태극기 제작 도구들이 모두 압수되었다. 3월 14일에는 부산지방법원에 불려가 데이비스와 호킹과 함께 대조 심문을 받았다. 영국 영사관의 개입으로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1924년 은퇴 후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1935년 9월 10일 별세하였다.

4. 데이지 호킹과 3.1운동

데이지 호킹ⓒ독립기념관
데이지 호킹ⓒ독립기념관

데이지 호킹은 1888년 11월 26일 오스트레일리아 벨라린(Bellarine)에서 태어났다. 26세 때인 1914년 9월 한국선교사로 승인된 후, 디커니스 훈련소에 들어가 18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1916년 3월 내한하였다. 부산선교부에 배치되어 어학공부를 하면서 선교훈련을 받았다. 1917년 초 스키너와 함께 마산선교부로 이전해 한국어 교사와 함께 비기독교 가정의 어린이들을 돌보았고, 시골 사경회에 참여하였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3년 동안 전도부인들의 도움을 받아 여성을 교육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을 책임졌다. 또한 어린이 성경학교와 타종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다.

1919년 3월 3.1운동 무렵에는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일신여학교 한국인 교사 박시연 등이 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부산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11일 저녁 시위에 나서자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교장 마가렛 데이비스와 함께 시위학생들을 설득하여 기숙사나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들을 막는 것이 소용이 없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시위선동 혐의로 교장 데이비스와 함께 검속되었다. 3월 14일 대조 심문을 위해 부산지방법원 법정에 다시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3월 15일에도 부산진파출소에 불려가 관리들과 헌병들에게 둘러싸여 3월 11일 사건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일제는 데이비스와 함께 그녀를 여학생들이 벌인 만세운동의 지휘자로 간주했다. 결국 영국 영사관의 개입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일제측 자료에 따르면 “데이지 호킹과 교장 마가렛 데이비스는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당시 데이지 호킹은 학생들에게 시위를 권유하며 함께 행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부터는 경남지역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후원하였는데, 1940년 3월 한상동 목사가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거부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운동방침을 협의하였다. 1941년 영일 관계 악화와 영국영사관의 권고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호주의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에 종사하다가 1971년 6월 10일 별세하였다.

5. 일신여학교 3.1운동의 의의

1919년 3월 11일 저녁 9시경 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동이 된 만세시위는 경남지역 3.1운동의 효시였다. 뒤이어 12일에는 마산, 13일에는 동래·창녕·밀양, 14일에는 통영·의령, 18일에는 하동·합천·진주, 19일에는 함안, 20일에는 거창·산청, 21일에는 사천, 24일에는 창원, 27일에는 양산, 28일에는 함양, 30일에는 고성, 31일에는 김해에서 독립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신여학교의 3.1만세운동 전개에 대한 일제의 상황 보고(「소요사건에 관한 민정휘보(1919.4.16.)(국내 제2보)」)
일신여학교의 3.1만세운동 전개에 대한 일제의 상황 보고(「소요사건에 관한 민정휘보(1919.4.16.)(국내 제2보)」)

일신여학교의 3.1운동은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대표적인 3.1운동에 해당했다. 사실 이 운동을 주동했던 교사 박시연 등도 여학교를 갓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교사로서보다는 선배로서의 영향력이 더 컸을 것이다. 특히 시위의 계획과 지휘를 비롯한 전반을 여교사와 여학생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여성 독립운동 분야에서 지니는 의미가 크다.

일신여학교의 3.1운동에서 교장과 교사였던 선교사들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우려하면서도 태극기 제작 준비를 도와주었고, 시위 당시 학생들을 보호했다. 이에 당시 일제 당국은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