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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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로 구성된 광복회는 지난 5월 25일 이종찬(87) 전 국가정보원장을 제23대 광복회장으로 선출했다. 6월 임기를 시작한 이 회장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1~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초대 국정원장직을 맡았다. 이 신임 회장의 장남인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과 대광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다. 윤 대통령이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난 직후 정치 입문을 고민할 때 이 교수 집을 찾아 부친인 이종찬 신임 회장에게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6월 2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만난 이 회장은 “애국선열의 자손답게 살도록 우대해 주고, 제복 입은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로 취임 첫 포부를 밝혔다. 5년 동안 회장이 5번 바뀌는 등 흔들리는 조직을 정리하고 화합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특히 그는 “독립운동은 총칼이 아닌 역사책을 들고 시작했다”며 “광복회 회장 취임 직후 회장 직속으로 대한 독립사를 연구하기 위한 학술원부터 만들계획인데 향후 이를 학교로 키워나가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마치고 대선을 고민할 때부터 자유를 강조했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윤 대통령은 끈질기고 절대 포기를 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라고 했다. 다만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인은 너무 앞서면 안 된다고 하더라. 한 발짝 나가지 말고 반 발짝만 나가야 한다고 했다”라며 “윤 대통령도 반 발짝만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 최근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되었다. 광복회장으로 어떻게 평가하나. “오래전부터 ‘부’로 승격되기를 희망했다. 정권에 따라 장관과 차관으로 급이 자주 바뀌다 보니 공무원들이 보훈을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한테도 후보 시절에 ‘보훈은 국가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국가에 공헌한 분들을 기억하고 북돋아 주는 것은 국가의 최고 대사 중 하나다. 왕조시대에는 종묘사직이 최우선이었다면, 국민주권 시대에는 보훈이 국민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혀 있어야 한다.”

-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1세대 애국지사들은 사실 거의 다 돌아가셨다. 이제 후세대가 제대로 선열의 정신을 잘 가꾸면서 모범적으로 살도록 해주어야 한다. 애국선열의 자손답게 살도록 우대해 줘야 한다. 다음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선서한 사람들이 있다. 1945년 내가 백범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할 때 백범 옆에 있던 윤경빈 경호관의 카키색 군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도 카키복 한번 입어봤으면 좋겠다 싶었다. 모든 소년들은 화려한 군복을 입고 싶은 욕망이 다 있다. 선진국은 다 군복을 입는 것을 명예로 생각한다. 경찰, 소방관, 간호사 등 제복을 입은 유니폼어(uniformer)가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 광복회가 회장이 계속 바뀌는 등 내부 갈등을 겪었고 고소·고발도 여러 건이다. 광복회 화합을 위해 무엇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나. “광복회가 5년 동안 회장이 5번 바뀌었다. 회장 두 사람은 수사를 받았고, 고소·고발도 20여건이 남아 있다. 이래서야 광복회가 존경받을 수 없다. 과거 독립운동을 할 때도 분열되곤 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다 화합했다. 심지어 봉오동 전투 할 때는 홍범도 장군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여단장 한다고 하니까 자신은 연대장 하겠다고 위상을 스스로 낮추면서 다툼을 극복했다. 우리는 선열의 후손이다. 선열의 삶의 자세를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배신이다. 화합은 광복회가 제일 크게 지켜야 할 덕목이다. 광복회에 많이 기여를 한 사람은 친구, 광복회를 욕하는 사람은 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로 1919년을 강조하는 이유는. “광복회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제일의 원로 단체라고 생각하라고 회원들에게 이야기한다. 임시정부 기념관에 가보면 파도가 치는 상징 벽화가 있다. 우리 항일 투쟁은 파도와 같은 격랑의 시대를 넘었다. 그 그림에 1919년 3·1독립선언을 새겨 넣었다. 3·1독립선언, 임시정부 헌장, 제헌헌법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날(1919년 3월 1일) 국민주권시대가 왔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독립하면 민주공화정으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나의 작은 아버지(성재 이시영)는 대한제국에서 한성재판소 소장, 임시정부에서 법부무 장관, 대한민국에서는 부통령이었다. 이분의 삶은 대한제국, 임시정부,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북한은 이런 것이 없어 1948년 9월 9일에 나라가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을 기미년(1919년)으로 기산한다고 선포한 바 있다. 이것은 이 대통령의 고등 전략이었다. 남북이 정통성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이미 30년 전부터 독립을 위해 싸운 나라이기에 더욱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 육사 16기로 임관했는데 당시 군 내부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나. “중국에서 10살 때까지 있었다. 어릴 때 중국 애를 한번 때려 준 일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와서 ‘너 임마 나라 잃은 망국노가 우리 귀한 자식 때리냐’고 난리를 쳤다. 나라 없는 설움이 그런 것이다. 그 말 들은 것이 철천지 한이 되었다. 육사 시험을 볼 때 ‘소위 독립운동 가문인가’라는 말을 들었다. 독립운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그 말을 듣고 어렸을 때 ‘나라 없는 놈’이라고 욕먹었던 일이 생각나더라.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보니 광복군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 광복군, 독립운동을 재조명할 생각은 없나. “우리는 독립운동을 총칼이 아닌 역사책을 들고 시작했다.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직속으로 대한 독립사를 연구하기 위한 학술원부터 만들 계획이다. 여러 곳에서 모금을 해서 재단을 튼튼하게 만든 다음에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할 생각이다. 이곳에서 연구가 어느 정도 이뤄지면 대학원대학교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최후 희망은 독립운동사 연구를 위한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학교 이름은 ‘광복 대학원대학교’이다.”

-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냈다. 과거 DJ 노벨상 수상식에 수행원에 포함되지 못해 아쉽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공직 수행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많나. “DJ가 노벨상을 수상하기까지 어려운 점이 많았다. 국내의 방해도 많았다. 내가 1995년 노르웨이에 가서 노벨상 사무총장을 만나서 DJ에게 상을 달라고 설득했다. DJ가 미국 망명을 마치고 정계 복귀했을 때다. 당시 사무총장은 ‘DJ가 사형선고 받고 미국으로 망명할 때 노벨상을 주려 했는데, 정계 복귀를 해서 안 된다’고 하더라. 노벨상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중에 보니 (국내에서) 굉장히 많은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음모 서신이 노르웨이 측에 이미 들어갔었다. 그런데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런데도 당시 민노총 위원장을 구속시켰다면서 민노총에서는 ‘노벨상 주면 안 된다’고 반대했었다. 노동자를 탄압했다는 것인데, 내가 노르웨이에 가서 ‘노동운동을 탄압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민노총 위원장)이 범법행위를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DJ 노벨상 시상식 때 나는 수행원에서 빠졌는데, 국정원장을 한 사람이 수행하면 혹시나 오해받을 것 같아 뺀 것 같더라. 노벨 평화상 시상식은 노르웨이에서 상을 받고 노벨위원회가 있는 스웨덴에 가는 일정이었는데 스웨덴 일정에는 내가 사비를 들여 참석했다.”

- 당시 노벨 평화상을 북한이 공동 수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인가. “우리 쪽에서 그런 이야기(남북 공동수상)가 나왔었다. 그래야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노르웨이에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길래 ‘이용당하는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했었다. 노르웨이 측도 ‘노벨상은 정략적인 배려로 주는 것이 아니다’고 하더라.”

- 어린 시절부터 아들 친구인 윤석열 대통령을 보아왔는데 무엇이 장점인가. “내 아들은 항상 1번으로 키가 작았는데, 윤석열은 키가 제일 컸다. 집사람이 아들이 어디 가서 얻어맞을까 걱정해서 ‘석열아 우리 아이 좀 잘 봐줘’라고 부탁하면 ‘제가 업고 다니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형 노릇을 했다. 끈질기고 절대 포기를 하지 않는다. 8전 9기로 고시에 합격하지 않았나.”

- 출마할 때 어떤 조언을 했나. “검찰총장 끝나고 한 번 왔다. 그때 대통령에 출마할 마음이 있다고 봤다. (자유시장경제를 강조한) 밀턴 프리드먼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그래서 내가 바로 다음 날 윤희숙 의원을 만나서 밀턴 프리드먼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대번에 (윤석열이 한 이야기인 줄) 알더라. 그러면서 ‘밀턴 프리드먼보다는 자유시장경제를 이야기하라고 하세요’라고 조언하더라.”

- 윤 대통령은 요즈음 자유와 시장경제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원래 그런 철학이었나. “윤 대통령 아버지가 아주 훌륭한 분이다. 아들이 대학에서 운동권 지라시 문서를 보는 모습을 보고 ‘차라리 사회주의 경제학 원전을 보라’고 했다. 괜히 덧칠한 것을 보지 말고 원본을 보라고 한 것인데 그 정도로 원리주의자이다. 윤 대통령은 시장경제보다는 자유를 강조한다. 자유의 신장과 옹호를 중요시한다.”

- 윤 대통령이 정치 경험이 없어서 걱정되지는 않나. “검찰총장 하면서 사람들 거느리고 운영한 것이 다 정치다. 그 사람이 살아온 것 자체가 정치다. 내가 광복회장 하면서 회원들과 화합하는 것도 정치다. 과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여러 정치인들과 대화를 해봤는데 윤석열과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 성공하는 대통령의 자질은 무엇인가. “성공한 대통령은 정치를 이상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현실로 본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가는 너무 앞서면 안 된다’고 하더라. ‘한 발짝 나가지 말고 반 발짝만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다’고 했다. 최근 한·일 관계의 경우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앞으로 윤 대통령이 반 발짝만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못 따라오는 사람이 반감을 가질 수 있다.”

- 지역구였던 종로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물려줬었는데 노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나. “노 전 대통령의 장점은 진실성이다. 그냥 어물어물 시간 때우는 것을 안 하는 사람이다. 지적할 것이 있으면 지적한다.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체면 차리지 않고 달려들어 토론한다.”

- 향후 개헌을 한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나. “1등만 뽑는 소선거구제는 국회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승자독식이다. 좋은 사람도 한 표가 부족해 다 떨어져 나간다. 나도 오랫동안 대통령제를 주장했으나 대통령제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제왕적 대통령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제 의원내각제로 가야 서로 타협해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4년 중임제는 반대한다. 그러면 첫 4년은 재선되려고 표퓰리즘이 심해질 것이다. 그냥 대통령제로 계속 가려면 6년 단임제가 낫다. 지금처럼 5년제로 하니까 배우는 데 1년, 레임덕 1년 빼고 3년밖에 일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