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문] 2.1대한독립선언 선포 105주년 기념사 및 학술대회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4.02.05

대한독립선언 선포 105주년 기념사 및 학술대회

[2024년 2월1일 광복회장 이 종 찬 ]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이후 우리 선열들의 대일항전은 끝없이 전개되었습니다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외치는 선언서, 결의서 격문을 합치면 약 80여종이나 된다고 일본의 고등경찰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姜德相 분석)

 

그 가운데 가장 기본을 이룬 선언은 1917년에 조소앙 선생이 기초한 「대동단결선언」, 처음으로 국민주권설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919년에 이르러 독립선언 세 가지가 차례로 각 지역에 따라 선언되었습니다.

1919년 2월1일 북만 간도지방, 러시아 연해주 일대. 1918년 11월 ‘무오독립선언’이라도도 하는데, 독립운동가들의 의지를 함께 모아 중국 길림에서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이 처음 선포되었습니다. 이게 효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선언을 근거로 대한국민회의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어서 그해 2월8일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13명의 대표의 이름으로 2.8독립선언이 선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해 3월1일. 서울에서 전 민족이 궐기하여 3.1독립선언을 선포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본 강점하에 있는 서울 지하에서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한편 4월 중국 상해에서 세계 각지에서 대표들이 모여들어 드디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처럼 각지에 임시정부를 세워지면 통일된 독립투쟁이 어렵다 하여 안창호 선생이 주동하여 통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법통은 한성임시정부로 하고, 인사는 연해주 국민의회정부 인사를 중심으로, 위치는 상해에 둔다는 원칙에 합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9월에 통합된 임시정부는 처음으로 대통령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상해에서 출범하게 된 것입니다.

 

1919년에 이런 위업들이 마치 시나리오가 있는 것처럼 질서있게 차례로 진행된 것을 보고 내외의 많은 국민들이 1919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원년이라 일치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가서 많은 국민들이 1919년에 수립된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이라 주장한 분도 계십니다. 이런 주장도 무리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건국은 아닙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게 강점당했을 뿐입니다. 강점하에 있어도 선열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입니다

 

3.1독립선언서에서 분명하게 명시된 것을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1919년 3월을 “조선건국 4352년 3월”로 분명하게 명시하였습니다.

 

이런 국민적 의지를 담아 1920년 2월23일 임시의정원 제7차 회의에서 10월3일을 건국기념일로 채택했던 것 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면 우리의 건국기념일은 당연히 10월3일로 해야 할 것이요. 우리나라는 4357년전 10월3일 건국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 있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해외공관에서, 이미 10월 3일을 건국절, 즉 The National Foundation Day라는 영어명으로 국경일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나라 건국일은 10월3일이 맞습니다. 개천절이 바로 건국절입니다. 동의하시면 박수로 동의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

 

오늘은 1919년 2월 1일 채택된 대한독립선언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제가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첫째, 이 선언은 항일무장투쟁의 본거지인 간도지방에서 이루어졌고 끝까지 육탄혈전을 강조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간도지방은 우리 무장투쟁역사에서 중요한 본거지입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는 시점을 계기로 국내에서

의병들이 다시 봉기했습니다.

 

의병들은 열세한 병력과 무기를 갖고 일본 정규군과 싸워서

내내 쫓기어 북상하여 결집한 곳이 북간도요, 연해주일대였습니다.

 

여기서 의병은 독립군으로 점차 확대되고 재편성되었던 것입니다. 독립군이 1940년 광복군으로 발전합니다. 저는 그래서 한발 더 나가 광복군이 국군으로 발전되었다고 했는데...

 

그러므로 이 선언은 일본과의 무장투쟁을 결의하고

전 민족이 봉기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당시 1차대전 직후 일본의 국위나 국세는 최고조로 달할 때였습니다.

 

대일무장 항전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는 격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열세한 민족이 끝까지 항전하는 그 기세는 세계 무장투쟁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만합니다.

 

그 후 아일랜드에서, 알제리에서, 베트남에서 벌어졌던

무장투쟁 승리의 역사는 모두 우리의 대일항전과 비견됩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도 열세한 군비를 갖고 막강한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둘째, 이 선언에서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으로서 자주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의 독립은 곧 정의로운 세계평화를 이루는 길임을 제시했다는 점이 특이 합니다.

 

비단 이 선언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선언에서 계속해서

반만년 역사의 문화민족임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역사는 반만년 동안 지속되어 왔고 우리는 결코 이웃을 침범하거나 패권을 탐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으로 시작합니다. 이말이 바로 우리는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계 일부에서는 아직도 우리의 5천년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여 마지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반만년 문화민족이라 자칭함은 침략자 일본에 비하여 우월함을 표시하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세계 어떤 나라도 오로지 군사, 무기, 전쟁, 살육으로 세계를 지배하려하는 행위는 세계 공의에 어긋남을 꾸짖는 소리입니다.

 

보세요! 우리 선조들이 계시다면 오늘의 북한에서 벌어지는 핵무장, 미사일 쏘는 침략적 행동을 이미 그때 꾸짖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은은 자기 부모, 조부도 잘 모른 것 같아요.

셋째, 대한독립선언에 서명한 39인은 각계를 대표한 분들이다.

 

이분들은 지역적으로 만주 간도지역, 중국본토, 극동 러시아 지역, 미주지역, 국내 인사 모두를 망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신별로는 대종교, 동제사, 신흥무관학교(경학사, 부민단, 백서농장), 간민교육회 (명동학교), 대한광복회, 재러한족회, 재미국민회 등에 속한 인사들이 모부였습니다.

 

이처럼 각계를 대표하였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후 이분들 가운데 한사람도 변절하거나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3개 선언이 모두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성, 천재 3인이 기초한

것이라 자랑하고 싶습니다.

 

대한독립선언은 조소앙 선생,

2.8독립선언은 이광수 선생,

3.1독립선언은 최남선 선생,

 

하지만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우리민족의 장래를 내다보고

나라를 나라답게 건설하는 길을, 비전을 제시하신 분은

조소앙 선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불행하게 최후의 8년간 북으로 납치되어 침묵으로 최후를 마쳤음은 오늘에 사는 우리 모두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기초하신 조소앙 선생의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자랑스런 대한민국 반만년의 역사와 문화민족을 과시한 건국의 역사를 다시 회고하고 오늘의 대한민국 역사로 승화하는 작업에 우리 모두 동참합시다.

 

감사합니다.

 

단기 건국 4357년, 대한민국 106년 2월 1일

 

광복회장 이 종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