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2월 독립운동가

02월의 독립운동가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1921~2009 / 1920~1992 /1921~2016)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 / 건국훈장 애국장/건국훈장 독립장서훈년도 :1963/1991/1963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지배 정책이 극에 달하던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선생들은 학교에 만연한 민족 차별을 목격하고,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 유흥수 선생은 비밀결사 ‘문예부’에 참여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의지를 담은 기관 잡지 『학생』의 발간에 앞장섰다.

1941년 선생들은 일제의 패망을 전망하여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비밀결사 ‘다혁당’을 조직하고 활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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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지배 정책이 극에 달하던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선생들은 학교에 만연한 민족 차별을 목격하고,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 유흥수 선생은 비밀결사 ‘문예부’에 참여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의지를 담은 기관 잡지 『학생』의 발간에 앞장섰다.

1941년 선생들은 일제의 패망을 전망하여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비밀결사 ‘다혁당’을 조직하고 활동을 이끌었다.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다. 세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가정 형편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모습에 매료되어 1937년 4월에 대구관립사범학교 심상과 9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민족차별 교육이 자행되던 학교는 이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을 모색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속적인 차별은 1939년 학생들의 노동력 강제동원과 일본과 조선학생의 마찰로 빚어진 왜관사건으로 폭발하였으며 많은 대구사범학교 조선인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드는 원인이 되었다.

세 선생은 왜관사건 이후 백의단을 조직했다. 백의단은 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선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 잡지 등을 읽고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다만 백의단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비밀결사에 대한 치밀한 준비와 명확한 인식 없이 왜관사건의 실상을 알고 난 후 울분에 찬 나머지 즉흥적으로 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대구사범학교 안에서는 독서회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키워나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런 독서회는 대구사범학교 안에서 항일단체를 결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어가면서 관헌들의 사회 감시와 통제는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대구사범학생들은 좀 더 조직적인 단체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체계화하려고 노력하였다. 1940년 11월 23일 유흥수 선생은 독서 모임의 활동을 주도하던 박효준, 이태길, 강두안 등과 전쟁 상황을 포함한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학생들은 세계정세를 볼 때 곧 일제가 패망하므로 다가올 독립을 위해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일치하였다. 이들은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을 양성하며, 독립운동을 벌여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의 결성에 동의하였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문예 활동을 표방한다는 의미로 비밀결사의 이름을 ‘문예부(文藝部)’라고 결정하였다. 문예부는 부원들의 내부 활동에 그치지 않고, 그 성과물을 잡지 형태의 책자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성과물이 기관 잡지 성격의 <학생(學生)>이었다. 유흥수 선생이 이 잡지의 발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문예부가 활동하던 무렵에 또 하나의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비밀결사는 1941년 1월 임병찬의 주도로 장세파, 안진강 등이 조직했으며, 문예부에서 활동하던 이태길과 강두안도 참여하였다. 연구회는 다가올 독립에 대비할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학생들은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독립을 위해 협력 매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태길과 강두안 두 명의 학생이 문예부와 연구회에서 동시에 활동했지만, 이들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서로의 조직 실체를 모르는 가운데 활동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의 졸업 등으로 조직의 존속이 어렵게 되자 규모를 키워 비밀결사를 새롭게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2월 중순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 등을 만나 그 동안의 상황을 설명하고 새로운 비밀결사의 결성을 제안하였다.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동기생으로 백의단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를 결성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 결과 동기생인 4학년 10여 명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비밀결사의 이름은 ‘다혁당(茶革黨)’으로 결정하였다. 영웅은 갈색 또는 흙색인 ‘다색(茶色)’을 좋아하며, 혁은 ‘혁명’을 의미하였다. 다혁당은 조직 체계에서 당수와 부당수를 두고,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4개 부서를 두었다.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혁당은 학생 각자의 관심과 능력에 맞추어 조직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는 독립 및 이후의 국가 건설을 위해 전문 분야별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권쾌복 선생은 당수를 맡았으며, 배학보 선생은 부당수를 맡고,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훈도로 활동하던 정현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내용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일제 경찰이 정현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윤독회가 발간한 <반딧불>이 발각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일제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예부의 활동 보고서가 발각되어 대구와 대전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다혁당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41년 12월에 35명이 예심에 회부되었으며, 이것은 이 시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사건은 뚜렷하고 가시적인 활동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역사적 의의가 컸다. 먼저 당시 지식인 중심의 조선인 명망가들이 일제에 협력하는 길로 가던 상황과는 달리 세 선생을 포함한 학생들은 조선독립을 확신하고 활동했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 시기 다른 사범학교 학생들이 식민지 지배 체제에 순응하여 조직화된 항일운동이 전무 한 상황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을 벌인 점이었다. 아울러 비밀결사 활동을 벌였던 학생들이 졸업 후 훈도로 진출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운동을 전개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쾌복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배학보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유흥수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