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독립운동가

04월의 독립운동가

이명균, 장석영, 유진태(파리장서운동)

훈격 :서훈년도 :

이명균 , 1863 ~1923 , 독립장 (1968)

장석영 , 1851 ~1926 , 독립장 (1980)

유진태 , 1872 ~1942 , 애국장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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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리장서운동, 세계를 향해 천명한 독립의 뜻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좋은 기회로 여기고 대응에 나섰다. 구체적인 방법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대표를 파견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동제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여운형(呂運亨)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선임하여 파리로 보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2월 8일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2.8독립선언서」에는 한국은 독립국이며, 이를 부인하는 일본을 상대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2.8독립선언을 배경으로 국내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 조직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초기 단계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들은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을 중심으로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추진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유림 명의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준비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고, 한편으로는 서명자 모집이 이루어졌다. 현재 확인되는「파리장서」의 판본은 8~9종이다. 이는 당시 유림이 독립에 대한 열망과 독립의 당위성을 글로 담아내기 위해 세심하고도 치밀하게 문안을 다듬었음을 보여준다.

파리장서ⓒ심산 김창숙 기념관
파리장서ⓒ심산 김창숙 기념관

최종 채택된 곽종석 본은 한 차례 수정을 거쳐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다. 유림 대표 137명이 뜻을 함께하여 서명자로 참여하였다. 이들 명의로 한국 독립을 청원하는 장문(長文)의 서신이 파리강화회의 의장과 국내외 각 기관에 발송되었다. 이 서신을「파리장서」, 이와 관련된 독립청원운동을 ‘파리장서운동’이라고 한다. 이명균·장석영·유진태는 여기에 참여하여 한일강제병합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했다.

2.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이명균

이명균(李明均, 1863∼1923)은 1863년 1월 14일 경북 김천시 구성면(龜城面) 상좌원리(上佐院里)에서 아버지 이연성(李淵性)과 어머니 옥산장씨(玉山張氏)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성장하였다. 1906년 5월 경북 지례의 사립 광흥학교(光興學校) 설립을 후원하였고, 1915년에는 광복회 회원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암살을 시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북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곽종석·김창숙 등이 주도한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1919년 4월 붙잡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예심종결결정(1923.9.30.)ⓒ국가기록원
예심종결결정(1923.9.30.)ⓒ국가기록원

풀려난 이명균은 1920년 조선독립후원의용단(朝鮮獨立後援義勇團)을 결성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는 경북 문경 일대에서 활동하던 신태식(申泰植)·김찬규(金燦奎) 등 20여 명이 해외 독립운동 단체 후원을 목표로 조직한 단체였다. 이명균은 의용단의 경북지역 군량총장(軍糧總長)을 맡아 활동하면서, 자기의 재산을 매각하여 여러 차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이에 임시정부는 1920년 10월 그를 임시정부의 의용단장(義勇團長) 겸 재무총장(財務總長)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 상황이 드러나 1922년 11월 체포되고 말았다. 대구지방법원 예심 과정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3년 5월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파리장서 초안을 작성한 장석영

장석영(張錫英, 1851∼1926)은 1851년 10월 24일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 각산리(角山里)에서 아버지 장시표(張時杓)와 어머니 청주정씨 사이에서 2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순화(舜華), 호는 추관(秋觀)·회당(晦堂), 이명은 장석교(張碩敎)이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면우(俛宇) 곽종석, 한계(寒溪) 이승희(李承熙) 등과 함께 이진상의 뛰어난 여덟 제자를 지칭하는‘주문팔현(洲門八賢)’으로 불렸다.

1905년 11월 이승희 등 300여 명의 영남 유림과 함께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오적의 참수를 요구하는「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2년 망명을 결심하고 100여 일간 만주 지역의 풍토를 살펴보았다. 이때의 기록인『요좌기행(遼左紀行)』이 남아있다. 이후 1915년부터 성주 초전면 고산마을에서 고양서당(高陽書堂)을 열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월 성주에 머물던 장석영에게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졌다. 장석영은 두 편의 글을 지어 하나는 도내(道內)에, 하나는 조선총독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성주 유림 송준필(宋浚弼)이 장석영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장서운동에 앞장서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장석영은 “파리국회(巴里國會, =파리강화회의)에 장서를 보내 우리 온 나라 인민의 심정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며 승낙하였다. 이후 장석영은 파리장서 초안을 작성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일본에게 병탄되었지만, 선왕의 교화가 이미 살과 골수에 배어 있고, 조국 사랑을 자나 깨나 잊지 않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일본인에게 강제되었다고 하지만, 한 사람도 그들의 신복(臣僕)이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라고 거짓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아! 하늘이 내려다보고 만국의 이목이 있으니 또 속여 넘길 수 있겠습니까?

-「파리장서(장석영본)」

다른 판본과 달리, 장석영이 쓴 초안에는 일제의 한국 침탈 과정이 시기별로 구체적으로 서술된 점이 주목된다. 동시에 장석영은 주변 인물들에게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할 것을 광범위하게 권유하였다.

장석영이 칠곡에 설립한 녹동서당(창건 당시는 ‘만서정’)의 모습ⓒ후손 제공
장석영이 칠곡에 설립한 녹동서당(창건 당시는 ‘만서정’)의 모습ⓒ후손 제공

김창숙이「파리장서」를 소지하고 중국 상해로 향하면서 운동이 일단락되자, 성주 유림 송준필은 3월 25일「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지어 배포하고, 4월 2일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참여자들이 체포되고, 조사 과정에서 파리장서운동이 일제에 알려지면서 장석영도 4월 9일 성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4월 16일 대구감옥으로 이감되고, 재판에 회부된 장석영은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 끝에 8월 21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때 옥중에서 기록한『흑산일록(黑山日錄)』이 남아있다. 이후 1925년 김창숙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서명자 확보를 위해 노력한 유진태

유진태(兪鎭泰, 1872∼1942)는 1872년 1월 5일 충북 괴산군(槐山郡)에서 태어났다. 1897년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파리장서운동이 전개되자, 유진태는 평안남북도 지역의 서명자 규합을 위한 책임을 맡아 활약하였다. 김창숙에게 영남 인사들과 별도로 파리장서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충남 청양의 임경호(林敬鎬)를 소개하여, 양측이 함께 장서운동을 전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김창숙이「파리장서」전달을 위해 중국으로 떠날 때, 중국에 먼저 망명해 있던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에게 김창숙에 대한 소개장을 써주는 등 장서가 무사히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 일과 관련하여 후일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서울특별시 중구 소재)ⓒ국가보훈부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서울특별시 중구 소재)ⓒ국가보훈부

유진태는 이후에도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1921년 6월 민족교육 운동 단체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해 12월에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할「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조선교육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어 1922년 3월 청년 계몽을 목표로 한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또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3월 조선민립대학(朝鮮民立大學) 설립을 이끌었다. 1927년 2월에는 민족협동전선체 신간회(新幹會) 창립을 위해 1만 원을 의연하였으며, 12월 신간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경성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4월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 제7대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서 활동하였다. 그해 5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한 파리장서운동

「파리장서」에는 독립에 대한 유림의 절박함이 담겨있다. “우리 한국이 비록 국력은 약소하나 2천만 명이 4천 년 역사를 지내 왔으며 우리 국사(國事)를 담당할 힘이 없지 아니할 것이거늘 어찌 이웃 나라의 다스림을 받으리오. (중략) 차라리 몸이 묶이어 죽음으로 나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으리라.”는 독립에 대한 유림의 결단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 보였다. 즉 이는 국제회의에 상정한 독립청원서의 구실을 하는 동시에,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선언한 의미를 띠는 것이다.

파리장서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1년 10월 1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파리장서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1년 10월 1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유림은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국권 수호에 앞장섰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시대 인식으로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이어 1919년 국제정세를 활용하여「파리장서」로 독립을 선언하기도 하고, 각 지역에서 3.1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후 1921년 중국을 상대로 한 독립청원 시도에 이어, 1925년 심산 김창숙이 계획한 제2차 유림단 의거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또한 매 시기 곳곳에서 사상적 수렴을 통해 줄기차게 항전을 이어갔다. 이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은 이러한 일련의 연속성 위에 전개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이 전 민족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라면, 파리장서운동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유림단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것이다. 이는 모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며, 인류사적으로 제국주의의 부당함에 맞선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