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월 독립운동가

07월의 독립운동가

황진남 / 이의경 / 김갑수((1897) ~1970/1899 ~1950/1894 ~1938)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애족장/건국포장서훈년도 :2019/1990/1993

1920년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로 활동

1923년 독일 유학중 관동대지진 학살문제를 규탄

1919년 국치기념일에 맞추어 만세시위때 사용했던 선전물 인쇄

1927년 독일 유학 중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

1919년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1921년 독일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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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로 활동
1923년 독일 유학중 관동대지진 학살문제를 규탄

1919년 국치기념일에 맞추어 만세시위때 사용했던 선전물 인쇄
1927년 독일 유학 중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

1919년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1921년 독일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 조직

황진남 / 이의경 / 김갑수

황진남 , (1897) ~1970 , 애족장 (2019)이의경 , 1899 ~1950 , 애족장 (1990)김갑수 , 1894 ~1938 , 건국포장 (1993)

독일에서 꽃 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면서 프랑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도가 높아졌다. 유학생들의 대부분은 상하이에서 프랑스 마르세이유항(港)으로 향하는 배를 통해 들어왔으며 서영해와 같이 프랑스에 남거나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한인 학생들은 면학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임시정부의 일을 도우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병행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유럽 최초의 한인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가 결성되어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고 외교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김갑수·황진남·이의경 등은 그중 주목할 인사들이다.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가한 배경은 각기 달랐다. 김갑수는 월남 이상재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황진남은 일찍이 미국으로 넘어가 안창호를 만나고 그의 임시정부 활동을 보좌했던 인물이다. 이의경은 국내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른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들은 유덕고려학우회를 조직한 이후 동지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했다.

독일 한인 유학생들의 리더 김갑수

김갑수(金甲洙, 1894∼1938)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4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월남 이상재(1850-1927)의 생가와 마주한 곳이었다. 숙박업을 경영하며 많은 재산을 쌓았던 김갑수의 부친 김영성은 이상재와 친분이 두터웠다. 1903년 옥고를 치르며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재가 1904년 고향에 교회를 세우려 할 때 김영성은 교회를 설립하는 자금을 대며 종지리 교회를 세웠다. 김갑수는 13세 때인 1907년 이상재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경신학교에 들어갔다. 경신학교는 당시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와있던 언더우드가 1886년에 정동에 있던 자기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 시작이었다. 1901년에는 종로 연지동에 새로이 학교를 마련하고 선교사인 J. S. 게일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명을 “깨우쳐 새로워진다”는 뜻의 이름인 ‘경신학교’로 바꿨다. 김유순·김규식·안창호·서병호 등이 이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김갑수는 월남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YMCA 영어학교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당시 변영로, 장면 등과 함께 공부했다. 21세 되던 1915년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서 여운형, 서병호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이 때 부터 김갑수는 조선인 유학생회를 이끌며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1918년 그는 애국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다행히 수감 도중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유덕고려학우회 사무실이 있덨던 건물ⓒ독립기념관
유덕고려학우회 사무실이 있덨던 건물ⓒ독립기념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독립운동가 김인전을 만났고 그의 여동생인 김정신과 결혼했다. 이 무렵 김갑수는 의정원 의원이었던 전북 출신 윤건중(尹建重)과 함께 임시정부 발행 국채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1년 27세 되던 해 그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파송하는 유학생 16명을 인솔하여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의 뷔이그즈대학에서 4년간 수학하며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인문학을 수학하는 것과는 달리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독일 생활 초창기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봉근의 주선으로 한 수도원에서 수개월간 생활하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1921년 베를린에서 결성된 유럽 최초의 유학생단체 ‘유덕고려학우회’의 첫 간사장을 맡았고 윤건중이 서무를 맡았다. 1923년에는 이극로와 김준연 등이 뒤를 이어받았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칸트슈트라세(Kantstraße) 122번지였다. 132번지는 바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봉근의 집이었다.

유덕고려학우회 김갑수가 재미한인학생회에 연대를 제안한 것을 소개하는 기사(국민보 1921년 12월 17일자)
유덕고려학우회 김갑수가 재미한인학생회에 연대를 제안한 것을 소개하는 기사(국민보 1921년 12월 17일자)

학우회는 자신들의 기관지로 「회보(Heba)」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알렸다.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으로 학업을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대외선전활동을 펼쳤고 여러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갑수는 독일유학생회 회장을 맡아 넓은 덕망으로 68명의 유학생을 이끌었다. 5년여의 유학생활을 마친 뒤 그는 1926년 32세 때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교 교감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동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흥중학교는 천도교계에서 1921년에 세운 학교로 유교계에서 세운 대성학교와 함께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1927년 김갑수는 윤건중의 권유로 다시 국내에 들어와 임시정부 자금 마련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1938년 8월 16일 향년 45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산면 종지리에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평소 좌우명인 ‘勿以感情使用 當以理性判斷(감정을 사용하지 말고 마땅히 이성으로 판단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국제외교에 뛰어난 임시정부의 인재 황진남

안창호와 황진남ⓒ독립기념관
안창호와 황진남ⓒ독립기념관

황진남(黃鎭南, 1897~1970)은 함흥 출생으로 1905년 무렵 아버지 황명선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 1910년 9월 한인학교 졸업식 당시 황진남은 연단에 올라 ‘대한국의 청년’이라는 주제로, “국가적·신앙적·윤리적으로 완전한 교육을 받을 때에, 우리가 능히 우리 대한국의 바라고 바라는 독립을 지금부터 10년 안에 건설할 줄 믿는다.”라고 연설하여 박수를 받았다. 이후 호놀룰루 마노아벨리에 있는 중앙태평양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7월 졸업했다. 1916년 황진남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캘리포니아대학 광물학과에 입학했다. 1917년 3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중앙총회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했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개소한 한인학생양성소에 입소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접한 황진남은 캘리포니아대학을 자퇴한 후 캘리포니아주 각처에 다니며 독립운동을 위한 유세를 펼쳤다. 1919년 3월 15일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전체대표회를 열고 안창호를 재미한인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황진남과 정인과를 통신원으로 임명하고 안창호를 수행하여 상하이에 파견하였다. 1919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한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었고 황진남과 정인과는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영문에 능숙하여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조선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자 선전문을 작성하였다.

다음해 3월 상하이 지역 신문에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폄훼하는 기사가 나돌자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 영문판 3월 16일자에 조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반박기사를 자신의 명의로 실었다. 1920년 6월 미국의원단이 아시아 각국을 순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황진남은 미국의원단을 상대로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안창호를 수행하여 필리핀으로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권이 마련되지 못하여 안타깝게 회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진남은 8월 16일 여운형과 함께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 실상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8월 17~20일에는 스몰, 캠프, 하디 하원의원 등을 만나 조선 독립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황진남은 9월 29일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17일 황진남은 임병직과 함께 프랑스 선박 아토란츠크호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28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그는 파리위원부에 방문한 후 5월 18일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에서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년 10월 9일자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관동대지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바를 게재하였다. 이 기사를 본 재독 한인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0월 12일 「한인학살」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전단을 제작하여 유럽과 미주 상하이 임시정부 등지에 배포하였다. 재독 한인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일의지를 대외에 알렸다. 이때 유덕고려학우회의 황진남과 고일청은 10월 18일 부르크하르트 박사를 찾아가 면담하며 진상을 파악하였다.

10월 26일에는 재독한인들에 의해 ‘독일에 있는 한인들의 위대한 회의(Great Meeting of Koreans in Germany)’라는 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당한 한인들의 억울한 죽음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규탄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는 「한국에서 일본의 유혈통치(Japanische Blutherrschaftin Korea)」라는 독문 전단지 5천부와 「Japan`s Bloody Rule in Korea」라는 영문 전단지 2천부를 작성하여 해외 한인사회와 각국 정부 및 기관에 배포하였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고 황진남·고일청·김준연의 서명이 적혀있다.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하여 수리학(數理學)을 전공하였다. 파리 유학 시절 그는 ‘시몬 흥’이라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부인과 함께 1938년 9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에서 살았다. 1944년에는 신설된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되자 황진남은 서울로 이주하여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동맹에 가입하고 비서로서 보좌하였다. 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서 외무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1948년 3월 18일 입법의원직을 사임 후 정치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황진남은 이후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번역과 통역 일을 맡아보았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 도쿄로 가서 일하다 1970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일에 남겨진 아름다운 한국의 기억 이의경

일제 고등경찰이 이의경이 외교시보를 배포한 사실을 탐지한 내용(『고등경찰요사』, 경상북도경찰부, 1934)
일제 고등경찰이 이의경이 외교시보를 배포한 사실을 탐지한 내용(『고등경찰요사』, 경상북도경찰부, 1934)

이의경(李儀景, 1899~1950)은 이미륵(李彌勒, Mirok Li)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재독 작가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1남 3녀 가운데 1남으로 출생했다. 이의경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옛 풍습에 따라 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편집부장으로 외교시보 발행 및 전단을 인쇄·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만세시위를 위해 작성된 <국치기념경고문> 300매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제에 수배되면서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이름을 ‘Yiking Li’라고 중국식으로 고친 후 상하이에서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1920년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탔다. 이의경은 마르세유에서 안봉근과 안중근의 종부성사를 집전했던 빌렘 신부의 도움을 받아 독일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로 간 후 다시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으로 가서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1928년에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뮌헨대학 재학 당시 이의경은 베를린대학의 이극로·황우일, 파리대학의 김법린 등과 함께 1927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벨기에 브뤼셀의 에그몽 궁(Palais d’Egmont)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결의대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대회에 첫째, 시모노세키조약을 실행해 한국의 독립을 확보할 것. 둘째, 한국 내 총독 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셋째,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의경은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소책자의 초안을 작성하고, 완성된 결의문을 독일어, 불어, 영어로 번역하여 한국이 처한 상황과 독립의 의지를 알렸다. 이들의 노력으로 2월 14일에 발표된 대회의 최종 결의안에 한국대표단의 결의문도 채택되어 포함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 피압박 민족대회 개최지인 에그몽궁전ⓒ독립기념관
세계 피압박 민족대회 개최지인 에그몽궁전ⓒ독립기념관

1928년 졸업 후 이의경은 잡지투고, 기고 및 번역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때 집필한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는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역작으로 1946년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언론은 올해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훌륭한 책으로 이미륵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의 작품은 독일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였다. 한국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죽음」이란 책을 통해 잘 알려진 독일의 저항단체 '백장미단'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은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 교수는 이미륵의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1943년 후버 교수가 교수형을 당하자 이미륵은 후버 교수의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등 의리를 지켰다. 훗날 후버 가족들은 동양인 이미륵을 "진정한 친구이자 의리 있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1948년부터는 뮌헨대학의 동양학부에서 한국학과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던 이의경은 한국전쟁을 앞둔 1950년 3월 20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그는 그래펠핑(Gräfelfing)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독일인들은 그를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기억했다. 이미륵의 인품에 매료되어 의학에서 동양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훗날 뮌헨대학 동양학부 교수가 된 그의 제자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는 “자기를 본보기로 삶의 가장 고귀한 가치를 입증한 한 인간이자 작가”라고 존경하는 마음을 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재독한인학생 독립운동의 의의

독일 내 한국독립운동은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유덕고려학우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했던 젊은 지식인들로서 직·간접적으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독일 내에서 이들은 국제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 활용하였다. 각종 홍보물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해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전파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이들이 제작해 배포한 「한국에서 일본의 유혈통치」와 「한국의 문제」 등의 홍보물은 유럽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오늘날 재독 한인사회의 역사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