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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를 통해 제가, 독립운동가셨던 친할아버지의 일생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작성자 : 장엄재건
  • 작성일 : 2020.11.28

안녕하십니까? 저는 '장엄재건'이라고 합니다.

문득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애국가의 첫소절이 생각이 나네요.

저는 생각도 못했는데 단지 광복회 홈페이지를 방문한 것만으로도

저는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그저 평범하고 오히려 보통사람들보다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마치 드넓은 동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또 웅장한 백두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더군요.

제가 이렇듯 광복회를 찾아오게 된 것은 저는 확신하고 있지만

어쩌면 제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품고

광복회에서 그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광복회를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먹고 사는 게 바쁘기도 하거니와 왠지 쉽사리 엄두가 나지 않네요.

우선 제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드리면 

제가 늦둥이이기는 하지만 저의 아버지께서는 1936년생으로

아버지의 성함은 '엄영호'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버지께서 배운 게 없다보니 알콜중독자에 노숙자로 사셨습니다.

저 역시 머리에 이가 생길만큼 어린시절 아버지와 노숙을 하다가,

이미 오래전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셨던

어머니와 살게 되었고 그런 어머니께서는 양아버지와 재혼을 하셨으며

저 역시 그분의 양자로서 '엄기동'이던 저는 장씨성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과정에서, 제가 양자가 아니라 양아버지의 친자인데

출생신고가 늦었다고 하여 그렇게 저의 호적이 두 개가 되었지만

장씨가 된 저의 호적에는 제가 '엄기동'이라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신 마당에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알콜중독자에 노숙자로 사셨던 분이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못하셨기에 혼인신고는 커녕 친아버지의 호적에 저의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엄기동'이라 한들 친아버지와의

관계를 증명할 방법은 없는 것이죠. 저는 친할아버지를 뵌 적도 없고 

한글도 배우지 못 하신 어머니로부터 제가 '엄창군'이 손자라며

친할아버지께서 의사였다는 말씀 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저와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인 친할아버지께서 병원의사인 줄 알고 있었고

제가 친아버지의 호적을 찾아보니 친할아버지의 성함이 '엄창군'이

아니라 '엄창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피는 물보다 진해서인지

그저 제 뿌리에 대한 막연한 이끌림으로 인터넷을 통해 '엄창근'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던 중 1919년 1월 1일 한겨레신문에,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유관순 열사와 함께 투옥된 '엄창근'이라는 분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당시 그분의 연세가 38세였고 서울에서 노동을 한 것으로 적혀있더군요.

만약에 그분이 친할아버지라면 50세가 넘어서 아버지를 낳으셨거나

으레 있는 일이니 아버지의 출생신고가 늦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던 아버지께서

배우신 게 없으니 알콜중독자에 노숙자로 사셨다고는 하지만

그런 분이 병원의사집안일 리는 없는 것이고 제가 어릴 때

어느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는 친할아버지께서 인력거를

끌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아무리 그당시에 인력거가

흔했다고는 하지만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직업이었을 것이며 그렇게 서울에서 흔하게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이 저는 인력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봅니다.

제 아버지의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엄창근'이라는 분과

상당히 닮아있고 이런 정황으로 보았을 때 저는 '엄창근'이라는

분이 저의 친할아버지가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제가 혹시나 하여 국가보훈처에 알아보니 제가 그분과의

관계를 입증할 방법이 없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엄창근'이라는 분의 생사여부나 그분의 가족들이 국가유공자의

유족이나 후손으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조차 확인이 되지 않더군요.

친할머니께서도 다른 분과 재혼을 하신 것인지 아니면 친할아버지와 재혼을

하셨던 것인지 친아버지의 이복형제가 여럿 있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으며

친할아버지께서 연세가 많으시니 당연히 돌아가셨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저는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고 다만

제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젊은시절을 방황하며 보냈던 것처럼 그런 친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친아버지께서도 평생을 방황하며 알콜중독자에 노숙자로

그런 안타까운 삶을 사셨던 게 아닐까 저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는 게 제가 엄씨임에도

장씨로 살 수 밖에 없으며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가 힘이 없다보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친아버지께서 유산으로 물려받아

그런 아픔이 저에게조차 대물림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우리가 한민족인데 제가 엄씨면 어떻고 장씨면 어떻겠습니까마는

엄씨집안이 대단한 집안은 아니지만 제가 엄씨라는 것은 제가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도 아닌 한국인이라는 뜻이며 게다가 저는 충신'엄흥도'의 후손으로서

제가 엄씨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제가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며 제가 독립운동가'엄창근'님의 손자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가 그분을

기억해드려야 하고 제가 엄씨로서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길 바라며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다른 나라의 지도자에 의해 우리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름이 '장엄재건'인 것은 풍비박산이 난 엄씨집안을 다시 일으켜세우겠다는 의지이며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나라를 바로세우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독립운동가'엄창근'님의 애국심을 폄하하는 것도 아니며 제가 그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훌륭한 독립운동가분들도 많은데 그저 유관순 열사와

독립만세를 외쳐서 감옥살이를 한 것이 독립운동가로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대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처럼 독립운동가분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오히려 우리보다 못한 분들이었고

가난했으며 배운 것도 없었지만 그분들의 애국심은 그무엇보다 값진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런 행복들이 그런 독립운동가분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가 그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나라를 지키며 계승하고 발전시켜나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만약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제가 겪어온 아픔들이 비단 저만의 비극일 것이며 다른 독립운동가의 후손분들의 처지나 상황 또한 저보다 더 하면

더 했지만 덜 하겠습니까마는 만약 광복회의 도움으로 제가 저의 이름을 되찾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게 된다면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아 또한 우리나라를

바로세우며 다른 독립운동가의 후손분들을 찾아내어 독립운동가분들의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고가 되실까 하여 제가 앞서 말씀드린 한겨레신문에 관련된 기사와 제 아버지의 사진을 첨부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41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