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경과보고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2.28

* 3.1운동 경과보고

3·1운동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온 겨레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궐기한 항일 독립운동이다. 동년 5월 30일까지 3개월 동안 계속되며 해외로까지 번져나간 3·1운동은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이듬해인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려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와 배상 등 전후 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래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해온 우리민족은 이 같은 국세정세의 변화를 주동적으로 포착하여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선포하고 이를 펴 나가기로 하였다. 이에 우리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의 선도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거족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 민족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실이다. 특히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각기 다른 종교가 저마다의 교리와 의식을 초월하여 민족자주독립의 대명제 하에 혼연히 손잡고 일어선 것은 우리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일로 새겨져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3·1운동의 불길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해외로 번져나가 우리 동포가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에 참여한 우리 민족은 모두 2,023,098명이며, 참여시군 211개 곳, 집회 횟수는 1,542회였으며, 이로 인한 피해로 일제의 총검에 의하여 7,509명이 살해되고 15,961명이 부상당하였으며, 46,948명이 투옥, 47동의 교회당과 2동의 한국인 학교와 715채의 민가가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3·1운동에서 우리 동포가 치른 희생은 막중하였으나, 반면에 우리가 거두어들인 성과 또한 지대하였다.
첫째, 3·1운동의 결과로 국호(國號)를‘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체(政體)를 ‘민주공화제’로 하는 주권재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국망(國亡) 10년 만에 민족주권을 회복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서 그 탄생은 우리 민족사의 새 기원을 여는 획기적인 기틀이 되었다. 그리하여 3·1 운동은 그 뒤로 이어지는 수많은 독립투쟁을 지도, 고무, 격려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3·1운동에 의하여 중국 동북지역, 노령 연해주 등지에서의 독립군의 무장독립 투쟁이 한층 심화되어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대파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셋째, 3·1운동으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이 제고된 반면에 일제의 잔학성과 불법성이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후원하는 여러 인사와 단체가 생겨났으며, 각국의 여론도 점차 한국에 대한 동조 내지 지원으로 기울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이로와 포츠담선언에서 세계열강이 전후 한국독립을 약속한 것도 3·1운동의 국제적인 영향력 덕분이었다.
넷째, 3·1운동은 세계 피압박국가의 민족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5·4운동을 비롯, 인도의 스와라지운동, 베트남·필리핀의 독립운동, 그밖에 인도차이나반도를 비롯한 이집트, 터키 등 아시아 여러 민족의 자유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3·1운동은 우리민족의 가장 높고, 큰 봉우리 일뿐만 아니라 세계 약소민족에게 자주독립의 희망과 의기를 북돋아 준 세계사적 운동이요, 온 누리의 평화와 정의와 양심의 승리를 상징하는 금자탑이다.
3·1운동 선열님들의 숭고한 뜻을 받든 우리 모두는 100년 전 오늘,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정당한 발동으로 떳떳이 들고 일어나‘우리가 독립국임과 우리민족이 자주민임’을 만천하에 선언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셨던 님들의 고귀한 독립운동정신을 되새기며, 국민 된 역할과 함께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민족사적 소임을 다해 나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