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4월 독립운동가

04월의 독립운동가

안태국(1877.04.18 ~(1920.04.11) )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서훈년도 :1962

1907년 4월 신민회 창립이후 최고위 간부로 활동, 평양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운영

1911년 105인사건 주모자로 붙잡혀 복역, 1919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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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태국 선생은 1877년경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가난한 농촌 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동오(東吾)이다.  장남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활동한 안명진(安明鎭)이었다. 

  ㅇ 법률사무소에 취업하여 활동을 시작한 1907년 9월경 안태국은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 신민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하고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ㅇ  신민회가 적극적으로 했던 활동이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이었다. 신민회의 모든 회원과 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하였고, 광범위하게 활동하였다. 

  ㅇ  선생은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하는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의 일도 도맡았다. 이는 신문 보급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국권회복운동 세력을 조직하고 확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창립하였다. 

  ㅇ  신민회가 강연회 및 학회활동 만큼 중요시 했던 것은 학교설립이었다. 이 중에서도 1908년 9월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가 가장 유명하였는데, 안태국은 대성학교의 육성을 위해 후원회장격인 찬무원으로 지원을 하였다. 
  
□  일제가 1910년 11월 ‘안명근 사건’(안악사건)을 기회로 1911년 1월 안악군을 중심으로 신민회 황해도지회와 중앙본부의 간부들을 검거하였고, 그 조사과정에서 간도에 독립군기지·무관학교 설립계획을 포착하여 신민회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ㅇ  또한 일제는 독립운동세력을 강력한 서북지방부터 해체하고자 이른바 ‘데라우치(寺內)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전국에 걸쳐서 신민회 간부급 애국자 600~700명을 일시에 체포하였다. 

  ㅇ  안태국은 당시 복역 중에 신민회 회원으로 지목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재기소되었다. 그는 공판 중에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면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논리정연하게 폭로하여 일제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ㅇ  그러나 1912년 9월 28일 안태국은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의 최고형인 10년 징역의 언도를 다시 받고, 모두 12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안태국은 1915년 2월 13일 투옥된 모든 인사들과 함께 투옥된 지 5년 만에 풀려났다. 

□  안태국 선생은 1916년 가족들을 이끌고 북간도 혼춘(琿春)으로 이주하여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ㅇ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몸담고 있던 안창호의 초청을 받은 안태국은 1920년 3월 25일 동지 이보(李輔)와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여 옛 동지들을 다시 만났다. 

  ㅇ  안태국을 북간도 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안태국은 장도에 오르기 전에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서 1920년 4월 11일 적십자 병원에서 순국하였다. 

  ㅇ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1920년 4월 14일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