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 독립운동가

02월의 독립운동가

강기덕(1886.05.04 ~미상)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서훈년도 :1990년

1927년 7월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준비위원회 설립위원

1930년 신간회 원산지회 집행위원장

1931년 5월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

상세자료받기

1927년 7월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준비위원회 설립위원

1930년 신간회 원산지회 집행위원장

1931년 5월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

1. 강기덕, 3·1운동 주역으로 우뚝서다.

1919년 2월 초순이었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 강기덕의 경성 하숙방(경성부 안국동 34번지, 현재 덕성여자고등학교 동쪽 후문 안마당)에는 여러학생들이 모였다. 당시 강기덕은 보성법률상업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원산 춘성고등학교 출신으로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과를 졸업한 후에 보성법률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으로 조직된 서북학생친목회를 통해 경성 내 여러 전문학교들과 인맥을 쌓고 있었다. 그는 안국동에 있는 자신의 하숙방에 여러 학생들을 모이게 한 이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조선의 독립을 얻어내려는 움직임이 지식층 사이에 진행중이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맡아야 할 역할이 크다!

강기덕의 이러한 말에 학생들이 동조하였다. 3·1운동 당시 학생층의 참여를 이끈 것이다. 이렇게 모인 학생들은 3·1운동의 전개 과정에 있어 일종의 행동대로서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강기덕은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각 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분배하였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강기덕은 김원벽과 함께 2차 시위의 학생층 대표로 선출되었다. 3월 4일에 시위의 방법을 주변 학생들과 논의하였고, 다음날인 3월 5일에는 남대문 정차장으로가서 인력거를 타고 깃발을 흔들며 군중들의 선두에 서서 함께 만세를 불렀다. 그는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48명 중 한 사람이었다.

이로 인하여 강기덕은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위 사진은 3·1운동 당시 강기덕의 사진이다. 5척 2촌 4분으로 키는 약 165센티에 미치지 못하지만, 당당한 인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체포된 이후에도 일제의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고향 원산에서 지역운동을 하다

강기덕은 1921년 11월 9일자로 만기출소하였다. 출소 이후 그는 실업(實業)을 하고 싶다며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우리가 가장 급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실업이니 먼저 산업을 발달시켜 국민의 혈액이라고 할만한 경제의 힘을 충실히 한 후가 아니면 도저히 생존권을 유지할 수 없을 줄 압니다.

강기덕 만기 출옥 기사(동아일보 1921년 11월 10일자)ⓒ국사편찬위원회
강기덕 만기 출옥 기사(동아일보 1921년 11월 10일자)ⓒ국사편찬위원회

그는 이렇듯 경제활동을 한다는 포부를 밝혔고, 이후 자신의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가 인쇄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3·1운동 정신은 이어갔다. 1924년 3월 경 강기덕이 운영하는 덕흥인쇄소는 원산 보광학교의 3·1운동 5주년 기념 삐라가 만들어 진 곳이기도 하였다.

강기덕은 교육에도 종사하였다. 그는 1923년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학부형회 부회장을 맡은바 있다.

또한 그는 원산 내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1923년 2월 3일 광석동(廣石洞) 예배당에서 원산 내 각 학생들을 대상으로‘혼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였다(원산교풍회(元山矯風會) 주최). 그는 원산에서 계속 강의를 했는데, 1925년 6월에는 북선양토진흥회(北鮮養兎振興會)에서 ‘농촌생활과 그의 장래’, 11월에는 러시아 혁명 8주년을 기념하여 원산노동청년회관에서 원산여자청년동명, 원산노동청년회, 원산인쇄공청년동맹, 원산무산청년회 등이 모여 기념식을 어떻게 할지 논의하는 자리에 강기덕이 연사로 나서서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 폭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25년 12월 13일 송흥청년회(松興靑年會)가 주최한 강연에서 ‘조선청년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고, 1926년 1월에는 덕원청년동맹(德源靑年同盟) 창립에 가담하였다. 이렇듯 그는 청년운동 지원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한편, 그는 언론인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일보』에 의하면 좌경향 사상단체가 원산에서 일제 검거 되었는데, 이들은 경성을 본거지로 하여 만주와 내지(內地, 일본)에서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14명 중의 하나가 바로 시대일보 원산 지국장 강기덕이었다. 그는 1924년 10월 17일 『시대일보』 고문을 맡고 있었고, 1925년 7월 1일 오후 10시 함남기자대회 발기인회에 가담하였다. 7월 17일 『시대일보』 주최 강연회를 맡았을 때 바로 그가 『시대일보』 원산지부 지국장을 맡고 있었던 시기였다. 1926년 8월 24일 원산에서 이웃한 안변의 안변삼합청년회에서 주최한 강연(800명 참석)에 연사로 나서 ‘중국 고대의 정전법’을 예로 들며 ‘조선의 무산계급과 농민계급’을 언급,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는 연설을 했다. 이로 인해 안변경찰서에서 그를 취조하게 되었다. 이전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곧 풀려난 것으로 보이나,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검사국에 압송된 이후 강기덕은 1926년 9월 10일 6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그는 재판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나는 무슨 특별하게 공산주의를 선언하거나 또는 선동한 것이 아니라 강연 주제가 조선 농민의 참상이라는 현재 조선 농민의 배경을 말한 뒤 현재 경작의 제도를 고쳐 어느정도까지 공유로 하여 그 수확의 어느 정도를 농민학교와 의원 등을 설치하여 농민으로는 그만큼 그들에게도 상당한 수입과 위안을 주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형을 받고 1927년 3월 27일에 만기 출소하였다.

3. 신간회의 마지막을 함께하다

강기덕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인하여 징역형을 살다가 다시 출소한 시기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협동전선을 꾸린 신간회 원산지회의 결성이 막 이루어진 참이었다. 강기덕은 이전에 물산장려후원기관으로 설립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위원, 조선민족단일전선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위원 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온한 발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고, 출소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4월 10일 오후 함남덕원청년동맹에서 정기총회 사회를 맡았다.

신간회 강령
신간회 강령

그가 신간회에 가담하게 된 시점은 1927년 7월 2일이었다. 원산의 유지 이가순(李可順), 한흥근(韓興根) 등과 함께 진명여자강습소에 모였다. 이들은 신간회 원산지회 설치 건을 의결하였고, 참여한 이들은 만장일치로 이에 대해 찬성했다. 그리하여 발기인회가 개최되었고, 임시의장에 이가순, 사회와 임시서기에 김상익(金相翊) 등이 임명되어 정식 개회하였다. 강기덕은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맡았다. 그리하여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대회가 7월 11일 오후 2시에 광석동(廣石洞) 남양(南陽) 사진관에서 이가순의 개회사로 열리게 되었다. 여기서 회장은 임시의장을 맡았던 이가순, 부회장은 사회와 임시서기를 맡았던 김상익이 각각 선출되었고, 강기덕은 간사를 맡았다.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데, 이 달 강기덕은 원산과 영흥, 고원 일대에서 청년들과 함께 한일병탄 기념일에 격문을 인쇄하고 배포할 계획을 세우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취조당했다.

1927년 12월 21일 신성보통학교(新成普通學校) 대강당에서 장내와 장외를 아우르는 많은 대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병사(病死)중에 영약(靈藥)’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안변신아청년회 주최)

그러던 와중에 함남기자연맹사건이 일어났다. 기자단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신문지법 중단을 촉구하였다. 또한 소작쟁의에 관한 불량지주의 죄악 조사와 농민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경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강기덕은 박헌영 등 8명과 1927년 12월 26일과 27일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에서 함남기자대회(제4회)를 열었다. 그들은 경찰의 해산에 불복하고 탄핵과 시위대회를 벌였고, 결국 강기덕은 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아, 1929년 11월 18일 만기출소했다.

출소 후 그는 신간회 원산지부 지회장에 선임되었지만, 광주학생항일운동 발생 이후 원산학생들이 일으킨 일제 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1930년 2월 8일 또다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강기덕은 다시 신간회 덕원지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원산지회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는 경제공황 이후 코민테른에서 민족주의자와 연합을 포기하라는 지령이 내려옴에 따라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신간회 전체대회가 있을 때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1년 5월 15일 일제 경찰 집회 허가로 전국대회를 소집하였지만, 해소를 결의하여 이날을 기점으로 신간회는 해체되었다.

박휘병 사회장 거행 기사(중앙일보 1933년 3월 19일자)ⓒ국립중앙도서관
박휘병 사회장 거행 기사(중앙일보 1933년 3월 19일자)ⓒ국립중앙도서관

그는 신간회 해체이후에도 여전히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에 참여한 동아일보 원산지국 기자 박휘병(朴輝秉)(원산 당하리)이 잡혀 원산 고등계에서 취조중에 1933년 3월 13일 사망하자, 강기덕은 그의 사회장을 준비했다가 검거되어 다시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원산노동조합의 간부로 재건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33년 또다시 징역 1년 2개월 형을 받았고, 1935년 3월 31일에 만기 출소했다. 일제강점기 그의 대부분의 삶은 독립운동과 이로 인한 형무소 수감생활이 대부분이었다.

4. 광복 이후 남북 분단을 막으려 애쓰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었다. 강기덕이 바라던 조선의 독립은 이루어졌으나, 광복과 함께 미국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게 되었고, 이 시점에서 강기덕은 남북분단을 막으려 애썼다. 그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위원장 권동진) 중앙위원과 김일성과 김두봉 등이 참여한 통일전선준비위원, 민주주의 민족전선준비위원회 위원, 미소공동위원회 촉성 독립전취 민중대회 준비회 결성인사 등을 맡았다. 한때 근로대중당에 영수로 가입하였다가 탈당하였고, 대한국민당 발기 준비회에 참여하였다. 강기덕은 UN임시위원단이 한국에 오자 다음과 같은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조선의 독립은 미소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련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남북통일공작의 사명을 띄고 입국한 UN위원단의 사명은 중차대하다. 민족의 요망과 UN위원단의 바라는 바와 일치하려면 반드시 UN위원단은 조선민족의 염원을 실질적으로 파악하기에 노력하여야 하며 무시해서는 안된다. 노력만 한다면 남북통일공작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우리 민족적 입장으로서는 양군의 철퇴를 주장 안할 수 없다.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 12명 선출 기사(중앙신문 1946년 2월 1일자)ⓒ국립중앙도서관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 12명 선출 기사(중앙신문 1946년 2월 1일자)ⓒ국립중앙도서관

요컨대 그는 일생 내내 독립운동을 하면서, 절반 가까이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낸 인물이었다. 또한 농민들을 보호하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임과 동시에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도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에 반탁운동을 전개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바라던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6·25전쟁 이후 납북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강기덕이야말로 진정한 좌우합작운동의 핵심 인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