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 독립운동가

09월의 독립운동가

올리버 알 애비슨/로버트 그리어슨 / 스탠리 해빌랜드 (1860 ~1956/1868 ~965/1870 ~1941 )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서훈년도 :1952/1968/1968

1. 은퇴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도운 선교사 : 올리버 알 애비슨

2. 성진 3.1운동을 후원한 선교사 : 로버트 그리어슨

3.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감사패까지 받은 선교사 : 스탠리 에이치 마틴

상세자료받기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배를 받고 있을 때 이 땅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특히 1919년 3월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이달의 외국인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올리버 R. 애비슨, 로버트 그리어슨, 스탠리 H. 마틴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였던 선교사들이다.

특히 애비슨은 1919년 3월 초 일본 고위 관리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대변하고, 3.1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전보로 귀국길에 일본에 머물고 있던 캐나다장로회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을 서울로 불러들여 3.1운동을 해외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은퇴한 후에도 미국에 돌아가 기독교인친한회의 재정을 맡아 임정승인과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하였다. 그리어슨은 성진 지역 3.1운동을 적극 도왔으며, 마틴은 용정 지역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병든 몸을 치료하는 의료선교사로 이 땅에 왔지만, 우리 민족의 병든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한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운 의료선교사들

올리버 알 애비슨(1860~1956), 로버트 그리어슨(1868~1965), 스탠리 에이치 마틴(1870~1941) 선생은 1919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가혹하게 민중을 탄압한 일본 총독부에 의하고 그들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으며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지원한 분들이다.

애비슨(Oliver R. Avision)은 1892년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서 선교하던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토론토대학을 방문하여 한국선교사 지원을 호소하는 강연을 듣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같은 해 6월 가족과 함께 한국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서 부임하였다. 그는 3·1운동 이후 총독부가 주최한 선교사 회합에서 한국인차별 철폐,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총독부 통치에 관한 불만을 전달하고 이런 문제를 항의하면서 개선요구를 하였다. 또한 귀국하는 선교총무 암스트롱에게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비망록을 작성하여 미국 장로회, 감리회 등에 보내 대책을 마련하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애비슨은 3·1운동의 부상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치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헌병경찰의 가택 수색과 환자 이송에 저항하고, 항의하였다.

이후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교장에 추대되었고, 선교사는 은퇴하여 1935년 12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귀환해서도 1942~43년 기독교인친한회 재무를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 1956년 미국 플로리다주 피츠버그에서 96세로 별세했다.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은 부인과 함께 1898년 9월 7일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899년 2월 함경남도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그가 세운 진료소는 1916년 제동병원(濟東病院)으로 발전하였다.

그리어슨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동휘(李東輝) 선생이 1908년부터 고향인 함경북도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이를 피하기 위해 1909년 봄 성진(현 함경북도)의 그리어슨을 찾아와 관할 구역 내 설교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동휘 선생이 국권회복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기꺼이 성서 매서인(賣書人, 판매원)으로 임명하고, 1년 후에는 조사(助事, 선교사)로 임명하여 자유롭게 그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도록 후원하였다.

그는 성진지역 3·1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도왔다. 그는 1919년 3월 7일 저녁 성진지역에서 다른 지역과 연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어 3월 9일 주일에는 그가 담임하던 성진 욱정교회에서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3월 10일 성진 만세시위는 제동병원 앞에서 시작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며 관공서, 경찰서가 있는 시내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일제 군경과 소방대가 출동하여 한국인을 무차별 구타하고 총을 난사하여 부상자가 속출하자 적극적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사람들을 면회하고 사식을 제공하여 이들의 만세운동을 후원하고 지지하였다.

1935년 정년퇴임 후 귀국하여 토론토(Toronto)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98세로 별세했다.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는 1916년 부인과 함께 캐나다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용정선교지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가 부임하고 건립한 제창병원(濟昌病院, St. Andrew Hospital)은 30개의 병상을 갖춘 현대식 건물로 남녀 입원실과 수술실, X선 촬영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용정이 있는 북간도 지역은 국내 만세소식을 듣고 「독립선언 축하회」형식으로 만세운동을 열기로 했다. 이「독립선언 축하회」는 1919년 3월 13일 정오 용정에서 개최되었다. 식장에는 대회장인 김영학, 회장 구춘선 장로, 부회장 배형식 목사등 북간도 지역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김영학의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 명의의 「독립선언 포고문」 낭독에 이어 유예균, 배형식, 황지영 여사의 연설이 있었고, 만세시위대는「정의인도」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로 돌진했다. 이때 시내 진입을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군이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날 시위에서 총에 맞아 기수 박문호를 비롯한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치명상을 입은 4명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받던 중 사망했으며, 중상자 18명을 비롯한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사상자들은 모두 제창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국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병원장 마틴은 사망자의 시체는 병원 지하실에 안치하게 하고, 의료진과 함께 부상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고, 사망자들을 위한 합동 장례까지 치러 주었다.

이러한 일 후에도 마틴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의 지지와 협조 속에 제창병원과 그 부속건물들은 자주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소와 숙박소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각종 문서들이 등사판으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런 그의 지원활동은 일제의 정보보고에도 확인될 만큼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마틴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에 감사하여 간도 대한국민회는 1920년 2월 이를 표창하는 기념패를 제작하여 그에게 수여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병원 간호사와 함께 1920년 10월 말경 일본군의 방화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사진을 촬영하고, ‘노루바위(장암동) 학살 사건’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대규모 조선인 학살인 간도참변의 실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후 1927년까지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다가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임명되어 근무지를 서울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흉부외과 과장과 세브란스 결핵병 방지회장을 맡아 한국인 특히 청년층의 고질병인 폐결핵의 퇴치에 힘썼다. 1940년 전운이 감돌자 귀국하였고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Richmond)에서 이듬해인 1941년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올리버 알 애비슨 선생에게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로버트 그리어슨 선생과 스탠리 에이치 마틴 선생에게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