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7월 독립운동가

07월의 독립운동가

손일봉/최철호/박철동/이정순(1912~1941/1915~1941/1915~1941/1918~1941)

훈격 :건국훈장 애국장서훈년도 :1993

항일독립전선의 샛별이 된 호가장 전투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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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항전을 도운 조선의용대의 활약상
2. 화북지대의 성립과 활동
3. 호가장 전투
4. 호가장 전투의 순국 4열사
5. 4열사에 대한 추모와 되새기는 정신

1. 중국항전을 도운 조선의용대의 활약상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호북성 한구(漢口)에서 창설된 군사대오이다. 만리장성 이남의 ‘관내’ 지역에서 나타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1939년 10월말에 조선의용대는 3개 지대(支隊)와 2개 독립분대를 거느리는 것으로 증편되었다. 조선의용대는 1939년 초부터 1940년 봄까지의 1년여 간 화중·화남의 항일전선에서 선전공작을 열심히 벌였고, 그 과정에 전투참가 경험도 어느정도 가졌다. 또한 1940년 봄에 화북진출을 위한 노력도 하고 있었다.

의용대 내부에서는 중국항전에 참가하는 ‘국제지원군’으로부터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혁명군’으로의 성장을 진로 초기부터 상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립전쟁의 발동과 그 승리를 위해서는 동북지역 즉 만주로 이동하여 군대의 규모와 역량을 키워야 함을 강조했다.

요컨대, 지금까지는 중국군 지원부대로서의 선전대에 불과하나 앞으로는 적의 무기를 탈취함에 의한 자체무장 전투부대가 되고 후방으로 침투하여 동포를 쟁취하며 본거지를 구축함으로써 동북 및 국내와의 연계를 도모하고 마침내 ‘최후의 결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지였다. 이것은 그 즈음의 의용대 내부에 팽배해있는 열망과 내심의 결의들을 그대로 반영시킨 것이었다. 그와 같이 의용대의 화북진출 포부는 진작부터 키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확대간부회의의 공식 결의를 근거 삼아 의용대 총대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북상이동을 건의하였다. 종착지는 동삼성정진군(東三省挺進軍) 사령부가 있는 수원성(綏遠省) 오원(五原)으로 제시하였다. 그러자 어렵지 않게 승인이 떨어졌다. 이에 총대부는 호북성의 2지대와 중경에서 대기 중인 3지대에 대하여 낙양행 명령을 내렸다.

 

2. 화북지대의 성립과 활동

 

태항산으로 들어간 조선의용대 병력은 입산 직후 1941년 7월 7일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되었다. 화북지대와 중경(重慶) 총대부와는 지휘명령 계선에 따른 통솔-복종 관계가 형식상 유지되었다. 그러나‘화북지대’로 명칭이 바뀜과 더불어 실질적인 지휘계통과 정치적 성격이 달라지게 되었고 총대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며 별도의 조직이 되었다. 지리적 요인과 정치적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기도 했다.

1941년 9월부터 개시되는 무장선전 공작을 위하여 화북지대는 무장선전대(이하 무선대)를 조직하고 3개 대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무선대원들은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 대상의 선전과 설득공작을 끈질기게 진행하였다. 그런가하면 일본군 주둔지로 침투하여 전단을 뿌리고 적군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투항권유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의용대의 선전물을 보거나 구두선전을 접한 이주민이나 조선인 병사가 어렵게 탈주하여 찾아오기도 했다.

 

3. 호가장 전투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무장선전대 제2대 대원 19명이 숙영지이던 호가장 마을을 포위 기습해온 일본군 및 괴뢰 황협군(皇協軍) 200명과 맞싸운 것이 호가장 전투이다.

무선대 제2대의 김세광 대장과 휘하 대원들은 1941년 11월 중순에 근거지 상무촌을 떠나 200km 밖의 평원 유격구(일본군 점령지와 팔로군 해방구와의 중간지대)인 원씨현으로 출동했다.

이동 중에 간혹 적군과 마주치는 일이 있으므로 전원 무장해 있었고, 300명가량의 팔로군이 호위 임무를 띠고 멀찍이서 따라다녔다. 그러던 차 11일 정오에 선옹채에서 200여 명(혹은 100명)의 적과 조우하여 접전 끝에 물리쳤다. 12일에는 민중대회를 호가장 마을에서 연 다음 서남방의 찬황으로 이동해 갈 예정이었다.

19명의 제2대 대원들은 호가장에서 하룻밤 숙영키로 하였다. 약 4리 떨어진 곳에서 팔로군 호위대가 야숙하며 경계를 맡아주기로 했음에 안심하고 대원들은 한 농가에 들어가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호가장에는 황협군 가족 5세대가 살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명이 마을 구장으로 그는 7리 밖의 자기편 군영으로 몰래 달려가 의용대의 동정을 밀고했다. 그리고는 팔로군의 야영지점을 피해서 오게끔 안내해준 결과로, 일본군과 황협군 각 1개 중대 병력이 밤사이 호가장 외곽으로 침투하여 의용대원 숙영지를 3,4백m 밖에서 3면으로 둘러싸고 포위망을 압축하였다.

동틀 무렵인 새벽 네 시쯤, 일본군이 지붕의 보초를 향해 총을 쏘았다. 놀라서 뛰어내려온 보초가 적의 습격을 외쳐 알렸다.

날이 밝았지만 안개가 짙었다. 적군은 안개를 뚫고 돌진할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군보다 최소 10배 이상의 병력에다 박격포 2문과 30정 이상의 경기관총도 갖고 왔다. 아군은 절대불리의 형세 속에서 탄환도 아끼면서 싸워야만 했다.

대원들은 고정지점에서의 방어를 아주 불리한 것으로 여기고, 농가를 빠져나가 인근 고지로 이동하여 방어하려고 했으나 일본군 및 황협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저지되었고 포위상태가 유지되었다.

본격적으로 적들이 돌격해오자 무선대원들은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방어하였고, 이후 일본군이 돌격하며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대원들은 총검을 겨누며 맞붙어 싸웠고 총검이 부러지면 총대를 거꾸로 들고 적병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초인적인 용맹이 대원들을 사자처럼 만들었다. 견디다 못한 적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이 열리자 대원들은 돌파구로 삼고 혈로를 열었다.

대원들은 농가 대문으로 빠져나가, 골짜기 건너편의 산줄기 세 개 중에서 가운데의 서쪽 산등성이로 올라가 포진하려 했다. 그러나 적이 강력하게 추격하자, 누군가가 후위를 엄호해주어야 했다. 김세광 대장이 2분대원 중 다섯 명이 후위를 맡아주도록 명했다. 그러자 손일봉 분대장이 제일 먼저 나섰고, 이어서 최철호, 이정순, 박철동, 김학철 대원이 뒤따랐다. 다른 대원들이 포위망과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탄약이 다 떨어지도록 싸우는 것이 임무였다. 이들은 각자 엄폐와 사격이 잘될 위치를 찾아 엎드린 상태에서 대기하였다. 그리고는 올라오는 적병을 한 명 한 명 겨누어 사격했다. 그러자 적은 추격을 중지하고 후위대에 포화를 집중시켰다. 5명의 후위대는 본대가 퇴각 정비할 때까지 용맹분투하여 4명(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이정순)이 순국하였고 김학철은 포로가 되었다. 덕분에 본대는 건너편 산등성이로 다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1시쯤에 팔로군 지원대가 도착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4. 호가장 전투의 순국 4열사

 

1) 손일봉(孫一峰)

 

손일봉은 1912년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발포로 부상을 입고 다리 불구가 되었다. 그러고도 불편한 몸을 일으켜 계속 농사에 종사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겨울이 되어 압록강이 얼면 독립군이 강을 건너와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폈고, 그 소식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버지와 독립군의 영향으로 손일봉은 독립운동에 뛰어들 생각을 10대 초부터 품었다.

주경야독으로 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손일봉은 1931년 초봄에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나 중국 청도(靑島)로 갔고, 1933년에 그는 상하이 훙커우(虹口)의 삼림기차양행에 서무원으로 취직하여 가명을 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던 중 1934년 3월 3일에 주중 일본대사와 상해 주둔 일본해군 육전대 사령관이 훙커우신사에서 전몰장병 초혼제를 거행할 것이라 함에, 그들을 폭살하려는 현장투탄 거사에 한국독립당원 강병학과 함께 참여하였다. 아쉽게도 폭탄 불발로 의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4월에 상하이를 떠난 손일봉은 낙양으로 가서 육군군관학교 분교에 입학해 다니고, 1935년 졸업 후 광주(廣州)로 가서 육군군관학교 제4분교에 다시 입학하였다. 1938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1939년 9월의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과 이듬해 6월의 신양(信陽) 회전 등 호남·호북성 일대의 전투에 10여회 종군하였다.

이후 조선의용대가 손일봉에게 의용대에 참여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손일봉은 그 부름에 응하여, 1940년 8월 초에 낙양으로 가서 조선의용대 제1지대에 가담하였다. 그리고는 1941년 황하를 건너 태항산으로 들어가고는 화북지대 무선대 제2대의 제2분대장이 되어 무장선전공작을 전개하다 호가장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2) 최철호(崔鐵鎬)

 

최철호는 1915년 6월 19일, 충청남도 대전에서 이른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대전 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형평운동에 참가하여 열심히 활동했다.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한청도(韓淸道) 또는 최명근(崔明根)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1937년 12월 당의 부름에 응하여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한인특훈반에 들어가 6개월간 교육받았다.

1938년 5월에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구로 옮겨가 최창익·김학무가 이끄는 조선청년전지복무단에 참가하였다. 1940년 10월에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도 가입해 활동하다 1941년 초에 낙양으로 간 그는 화북진출 대오에 합류하였고, 화북지대원이 되어 열심히 활동하다 호가장 전투에서 순국한 것이다.

 

3) 박철동(朴喆東)

 

박철동의 출생지는 아직 미상이지만, 1915년 충청북도 충주 태생인 것으로 짐작된다.

박철동은 작은 키에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백절불굴의 강직한 성품을 타고나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는 대담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심양(瀋陽)으로 간 그는 조그만 가게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익히고 야간학교에도 들어갔다. 1932년 그는 야간학교에서 재(在)남경 조선혁명당의 동북특파원과 접촉하게 되어 남경으로 출발하였고, 상해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나키스트 항일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하였다.

1934년 1월에 박철동은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2기생으로 들어가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신한독립당에 가입했던 그는 1935년 7월에 통일대당으로 탄생한 민족혁명당에 자동 가입되었다. 그 해 당의 지령을 받고 공작차 화남으로 가던 붙잡혀 일본 큐슈(九州)로 압송되어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1938년 가을에 출옥한 박철동은 고향에 들렀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했음을 알았다. 이에 그는 감시망을 뚫고 은밀히 고향을 떠나 그해 겨울 중국 산서성의 운성(運城)으로 들어갔다.

운성에서 박철동은 현지 조선청년들을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한편, 매일 저녁 몰래 전단을 살포하고 표어를 붙이는 등 반일공작을 진행하였다. 그러는 중 1939년에 조선의용대 제1지대로 들어갔다.

싸움 잘하고 일 잘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다 하여 동지들은 그를 ‘꼬리 없는 송아지’라는 별명으로도 불렀다. 그도 1941년 5월에 황하를 건너 태항산으로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일원으로서 대적선전공작에 참여하다 호가장 전투를 맞게 된 것이었다.

 

4) 이정순(李正淳)

 

이정순은 1918년 평안북도 벽동군 송서면에서 태어났다. 1932년에 향리의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 간부인 맏형 이영준(李英駿)을 찾아 중국 남경(南京)으로 갔다. 거기서 의열단이 설립하여 운영 중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제2기로 입학하여 1933년 9월부터 6개월간 정치·군사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졸업하였다. 지독한 책벌레이고 생활태도가 반듯하며 책임감이 투철한 인재였다고 한다.

졸업 후 남경에서 왕현순(王賢淳) 또는 한대성(韓大成)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의열단의 비밀공작을 수행하였다. 1938년 5월 군관학교를 졸업하여 한구로 이동하고 그 해 10월의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가했다. 제1구대원이 되어 호남성과 강서성 방면에서의 선전공작에 종사하던 그는 1939년 남악(南岳) 유격간부훈련반에서 3개월간 훈련받고 낙양으로 옮겨가 조선의용대 제1지대에 합류하였다. 거기서 계속 활동하다 1941년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진출할 때 동행하였다. 그리고 화북지대의 무선대원으로 활약하다 호가장 전투에서 순국한 것이다. 1920년대부터 한결같이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갔던 형 이영준도 1940년대 초에 중경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1993년에 우리 정부는 네 열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전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 독립운동사에서 호가장 전투의 의의

 

돌이켜보면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가서 치른 최초의 전투였다.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싸운 혈전이었다. 적군과의 병력 대비가 엄청나게 차이나는 중에도 대원들은 장시간 고군분투하였고, 기습을 당했으면서도 지혜롭게 대응하여 희생을 최소화하였다. 그것은 후일의 항일광복전선에서도 귀감이 되기에 충분할 선례였다.

전투현장의 무선대원 전원이 감투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포위망을 돌파해갔고, 후위대의 다섯 용사는 죽음을 각오하고도 두려움 없이 마지막까지 응전하였다. 이런 호가장 전투의 활약은 팔로군과 중국인들도 감격시켜 그 항일 의기를 더욱 고양시켰고, 조선의용대를 믿을 수 있는 우군으로 여기게끔 했다. 그래서 화북지역의 각급학교 교과서에도 실어서 그 기백과 무용을 절찬하고 본받게끔 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전투는 정규군 전투요원이 아닌 유격대식 선전공작대의 활동 중에 벌어진 것인데도 의용대는 적을 물리쳐, 일본군의 사기를 한껏 꺾어놓았다. 반면에 조선의용대로서는 부쩍 커진 자기역량의 재인식으로 더 큰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이 독립전선에서 마침내 거두게 될 최종적 승리를 예고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