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 독립운동가

0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 이선호 / 박래원 / 이동환(1897~1930/1904~1950/1902~1982/1901~1982)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애국장/애족장/애족장서훈년도 :2005/1991/2005/1990

민족통합을 이룬 6.10만세운동

침체되어 있는 독립운동에 새로운 불씨를 지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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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순종 승하 이후 6.10투쟁특별위원회 조직하고 만세운동 준비 중 체포

193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6.10만세운동 준비세력인 조선사회과학연구소 창립 주요인물

징역 1년형 선고받고 옥고 치름


1926년 6.10만세운동 기획, 격문 인쇄와 배포 담당

거사 직전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 선고받음


6.10 만세운동 당시 격문을 작성하여 배부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 선고받음

자생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한 고보학생들 중 한명

권오설(1897~1930), 이선호(1904~1950), 박래원(1902~1982), 이동환(1901~1982)선생은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6·10만세운동은 융희황제(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 장례 행렬이 지나는 연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당초 조선총독부는 그 뿌리까지 찾아 관련자들을 ‘엄벌’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식민지통치의 부당성만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라는 자기모순에 빠지며, 결국 11명의 학생만 재판에 회부해 ‘사건’을 크게 축소시켰다. 융희황제 인산일에 울분과 감정을 이기지 못한 소수 학생들이 ‘감상적’ 민족의식에 빠져 일으킨 만세소요로 ‘사건’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에 대한 왜곡은 안타깝게도 그대로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6·10만세운동의 역사상을 세울 수 없었다.

6·10만세운동의 계획을 구체화시킨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계획 초기부터 천도교를 가장 유력한 제휴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투쟁지도부는 6·10만세운동의 거사를 위해 천도교 세력과 연대를 모색해 갔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와의 연결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과 박래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은 경북 안동 풍서면 가곡리에서 출생했다. 안동의 전통적 반촌에서 성장한 그는 대구고보를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마치지 못했다. 3․1운동 참가 이후 그는 고향에서 학술강습소를 개최하면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교육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적 수탈과 식민지 수탈의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던 농민의 현실을 직시하고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오설의 중앙 진출은 안동에서의 운동 경험과 기반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중앙에 진출한 이후에도 권오설은 중앙과 연계하며 안동의 대중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발전시켜 나갔다.

6․10만세운동에서 권오설은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운동의 추진 과정이나 모든 계획이 그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었다. 권오설은 공산청년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안동 출신의 이선호, 유면희, 권태성, 권오상 등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연희전문학교와 중앙고보 등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해 갔다. 그가 작성한 「격고문」의 사상적 성향은 1920년대 초 극단의 계급지상주의를 극복하고 있었으며, 민족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민족혁명을 위해 결합된 이념과 노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출옥을 얼마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래원(朴來源, 1902∼1982)은 동학의 집안에서 생장했다. 그는 천도교 청년계에서 활약하는 한편 박래홍의 후원에 의해 사회주의운동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대일인쇄기계회사에 다니던 중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한 그는 경성노동연맹, 인쇄직공조합연맹,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 등의 인쇄직공 계통과 화요회 계열의 청년·사상단체에서 활발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오설과는 깊은 동지적 관계를 이루었으며,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의 양 세력을 연결하는 매개 고리로 역할하는 바탕이 되었다.

박래원은 권오설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임무 부여와 함께 가장 먼저 권동진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박래홍 등에게도 알렸다. 이들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거사일이 임박해 오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하지 못할 때 박래원이 권동진에게 1만 원의 자금을 요청하니 주었던 사실, 인쇄한 격문을 천도교당 내에 감춰 둘 수 있었던 것, 만세시위에 천도교의 지방조직을 적극 활용하려 했던 사실 등은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들이 배후에서 적극 지원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3.1운동 당시 큰 피해를 입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일선에 나서지 않은 채 배후에서 청년세력의 활동을 지원하는 정도에서 참여하였으며, 지원 사실도 절대로 비밀에 붙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박래원은 자금 조달 내지는 조직 동원과 관련하여 천도교의 혁신세력 인사들과도 폭넓게 연대를 모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박래원을 중심한 천도교 측의 주요 임무는 격문 인쇄 및 배포와 지방 조직의 활용을 통한 지방 만세운동의 확산에 있었다. 박래원은 천도교청년동맹과 인쇄직공조합의 인사들을 포섭했다. 그는 격문의 지방배포와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세워놓고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선호(李先鎬, 1904∼1950) 경북 안동 출신이다. 그는 1925년 조선공학회에 참가하면서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1925년 9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할 때 사업부 책임자, 1925년 11월 임시집행부 등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이병립과 함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한 6·10만세운동의 계획 주체로 활약했다. 이선호와 이병립 등은 학생 포섭의 역할을 맡으며 세칭 ‘통동계’와 연락을 취했다.

융희황제 승하 이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내에서는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조선공산당의 권오설과 연결되면서, 5월 상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해 갔다. 이때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는 인산 당일 가두 행렬의 선두에 서서 전단을 배포하고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만세운동에의 불을 당기는 것이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은 서울지역 만세운동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협의했고, 서울지역 각급 학교의 대표들을 통하여 각 학교 학생들을 포섭해 갔다. 이 과정에서 ‘통동계’와도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거사 직전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면서 6․10만세운동의 전국적 계획은 좌절되는 상황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역할 분담되었던 당초 서울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독자적으로 결행에 옮기었으니 6월 10일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1927년 9월 20일 감옥에서 풀려난 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일경에 붙잡히는 일을 거듭하다가 1933년 귀국했다. 6·25전쟁 때 행불이 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통동계라 하면 일반적으로 박용규, 이동환,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 등 5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운동의 처음부터 거사까지 뜻을 같이한 학생 동지였다.

통동계의 운동이 갖는 의미는, 첫째,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해 갔던 점이다. 그리고 자생적으로 생겨났던 점이다. 독자적이고 자생적으로 대중적 만세운동을 구상하고 추진해 갔던 것은 6·10만세운동에서 귀중한 사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주체가 순연한 학생들이었던 점이다. 거사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운동은 자기 완결적 성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들의 운동이 일제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거사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거사 직전 조선공산당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경계와 수색은 그야말로 삼엄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이때에도 이들은 각 학교에 선언문을 배포하고 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일정하게 연대를 모색하며 인산 당일의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동환(李東煥, 1901∼1982)은 전북 정읍 출신이다. 이동환은 항일적 민족의식이 투철한 성격이었다. 6·10만세운동에 앞서 투쟁방법에 대해 논의가 있었는데, 이동환은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기관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충정로(本町) 일대의 폭파와 같은 보다 강력한 투쟁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의한 투쟁방법은 일동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 할때에 필요한 자금은 고향에서 보내오는 생활비의 일부와 외투, 책을 팔아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동환 등 동지들은 인쇄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이동환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 동급생인 박용규 등과 양측에서 연락을 담당하면서 연대 투쟁을 추진해 갔다.

거사 후 체포되어 일제의 법정에 섰던 이동환은 “조선이 당장에 독립은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굳센 의지를 내보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6·10만세운동의 총본부인 ‘대한독립당’은 종교계, 사회주의, 민족주의, 학생, 청년 등의 세력을 망라한 명실공히 민족협동전선체를 지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6·10만세운동 계획이 거사 직전 6월 6일 발각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계열의 조직이 먼저 파괴되고 말았다. 위기 상황에서 체포망을 피한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추진되었고 당일 성공적인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거행한 ‘제2의 만세운동’이었다.

하지만 운동의 추진 배경이나 주체, 이념, 성격 등에서 3․1운동과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었다. 3․1운동이 1차 대전 후 인도주의가 부상하면서 세계 개조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가 공고해지며 국제적으로 고립된 처지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그만큼 6·10만세운동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운동의 주체들도 3·1운동 때와는 세대를 달리했다. 3·1운동에서 전위를 담당했던 학생계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중심 주체로 나선 것이다. 그에 따라 운동의 이념도 다원해졌다. 3․1운동의 지도 이념이 자유주의 사상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민족독립으로 모아지면서 이념적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3·1운동에서 종교이념을 초월했다면, 6·10만세운동에서는 정치이념까지 초월하는 민족통합을 추구한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에서 보여준 민족협동전선의 실천은 이후 국내외 민족세력의 최대 당면과제로 부상한 민족대당촉성운동을 촉진했다. 1926년 7월에 상해에서 열린 6·10만세운동에 관한 연설회에서, 안창호는 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민중의 통일기관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민족대당촉성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또 운동 주체의 하나였던 조선공산당은 「조선공산당선언」에서 6·10만세운동을 “3·1운동에 비하야 철저한 목적, 표어 및 투쟁방침을 가지어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하는 민족혁명유일전선의 제작상 확고한 첫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초월적 독립운동계의 통합 운동은 만주까지 확산돼 3부의 독립군을 통합하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이어졌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성립의 직접적 배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