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4월 독립운동가

04월의 독립운동가

김원용/전경무/심영신/민함나(1896~1976/1900~1947/1882~1975/미상~1942)

훈격 :건국훈장 애국장/애국장/애국장/애족장서훈년도 :1995/1995/1997/2019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자 통일된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미주 한인 대회가 열렸다. 한인대회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효과적인 외교활동을 위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을 대미(對美) 외교 대표로 선정했다. 하와이와 미국 곳곳에 거주하는 한인의 독립운동 열망을 임시정부 지원과 외교활동으로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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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위한 미주지역의 거국적 단합, 독립의 원동력이 되다

                                   김원용(金元容, 1896~1976, 미주방면, 애국장, 1995)

전경무(田耕武, 1898~1947, 미주방면, 애국장, 1995)

심영신(沈永信, 1882~1975, 미주방면, 애국장, 1997)

민함나(閔함나, 1888~1952, 미주방면, 애족장, 2019)

 

김원용, 전경무, 심영신, 민함나 선생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자 통일된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미주 한인 대회가 열렸다.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재미한족 9개 단체 15명의 대표들이 1941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13일 동안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한 결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이 발표되었다.

독립운동 단체를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라는 연합기관을 설치하고 13개조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규정」을 결의하였다. 효과적인 외교활동을 위해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을 대미(對美) 외교 대표로 선정했다. 하와이와 미국 곳곳에 거주하는 한인의 독립운동 열망을 임시정부 지원과 외교활동으로 집중시켰다.

미주지역 최고기관으로 탄생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본토에 집행부를 두고, 하와이에 의사부를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와이의 의사부 위원장은이원순, 부위원장은 안원규가 맡았으며, 비서위원으로 국문서기에 도진호, 영문서기에 김원용이 선출되었다. 민함나와 심영신은 부인구제회 대표 총 11명의 의사부 위원 중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중국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고 미주 한인단체와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충칭특파원을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충칭특파원으로 임명된 전경무는 1942년 10월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로 가서 이승만의 협조를 구하였으나, 운동방법의 차이 등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전경무는 미국에 한인출신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과 적극적인 활용을 요청하는 외교적 노력을 지속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대미외교와 활성화와 외교 독립운동 변화를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위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와는 끝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1944년 6월 10일 위싱턴에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의사부에서 김원용·도진호·전경무 3명과 집행부에서 김용중 등 4명이 위싱턴사무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위원장 김원용과 대외교섭을 맡은 선전부장 전경무가 외교활동을 주도하였다. 전경무는 뉴욕 콜럼비아 라디오 방송본부에서 전 미국을 상대로 ‘한국은 왜 독립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방송에 출현하여 한인들의 독립 열망을 선전하였다. 밖으로는 미국의 라디오 방송이나 교육부 등 주요기관, 그리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여 연설로 한국문제를 선전하여 미국인의 관심을 모았다. 미국 우정국의 한국 우표 발행에 참여해 1944년 11월 2일, 미국사회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들어간 한국우표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연합국에 유리하게 진행되면서 전후 세계적인 국제기구를 조직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회의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에 참여할 대표단을 구성하여 조국 독립의 의지를 밝히려 했다.

하지만 연합국에게만 허용된 참가권을 얻지 못한 해외한족대표단은 주미외교위원부와 협력하여 공동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선전부장 전경무는 한국의 상황과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렸다.

1945년 워싱턴사무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김원용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이 되어 하와이로 돌아가면서 1945년 5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개년 계획」이라는 문건을 발표하였다. 이 문건에서 김원용은 재미한인들은 해방된 조국의 국가건설을 위해 짊어진 무거운 책임과 헌신적인 노력을 강조했다. 김원용이 하와이로 돌아간 후에도 전경무는 외교활동에 주력했고 사무소의 조직을 확장하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외교적 노력과 병행하여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모집 운동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1942년 2월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의 대대적인 모금을 위해 독립금 수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민함나는 의사부 위원으로 호놀룰루에서 독립금 예약 운동을 담당하였고, 1943년에도 독립운동 자금 지원 예약 확보와 모금에 매진했다.

심영신은 미국 육군부 소속 건축부에서 사업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으며 본인의 월급 전액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열성적인 후원은 김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