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3월 독립운동가

03월의 독립운동가

이인정 / 송재만 / 한운석(1859~1934 / 1891~1951 / 1884~1950)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애족장/애족장서훈년도 :1990년

3.1운동 당시 대호지면장으로 대호지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진행을 주도, 징역 1년형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대호지면사무소 사환으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진행, 징역 5년형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반곡학당 훈장으로 애국가를 작사하고 천의장터 장날 만세운동 전개로 징역 1년형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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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4일 충청남도 서산군(현 당진시) 대호지면 – 정미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고종 국장에 참례한 유생들이 귀향해 서울의 3·1독립운동을 전하고 대호지면사무소 면직원들이 독립만세를 준비했다. 면민들에게 집합 공문을 발송하고 한운석이 애국가를 작사하여 인쇄하고 송재만 등이 태극기를 제작했다.

면장 이인정이 면사무소에서 4~500명 면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고 지휘하여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송재만, 한운석 등은 1000명의 군중들과 천의시장,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제의 진압에 맞서 주재소를 공격 파괴하고 일경과 일본인을 응징했다.

 민·관이 하나되어 저항한 만세운동

이인정, 한운석, 송재만 선생은 4·4 대호지·정미 독립만세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세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과 고종의 국장을 목격하고 온 대호지 지역 유생들과 협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실무를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송재만 선생은 면내 8개 마을 구장이나 구장대리의 집으로 방문해 직접 공문을 전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밤에 면사무소에 한운석 선생을 초청하여 계획을 알리고 애국가가 필요하다며 작사를 요청했다. 한운석 선생은 독립운동의 취지에 찬성하여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인정 선생은 거사 당일인 4월 4일 대호지면 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면민 4~500명에게 ‘도로 수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 각자 찬성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향해 가자’고 연설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어 면 직원인 송재만 선생이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앞세우고 애국가가 적힌 인쇄물을 배포했다. 그의 지휘 하에 군중들은 오전 11시경 천의시장에 도착하여 시장 일대와 천의 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을 활보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일경들은 1,000명이 이르는 만세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진압 해산시키지 못하고 관망만 했다. 이후 오후가 되어 귀가하려는 민중들에게 당진에서 출동한 일경 2명과 주재소 순사, 순사보가 태극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함으로 군중들은 저항하며 돌을 던지고 일경들을 구타했다. 그러자 일경들은 주재소로 도주했고, 군중들은 주재소를 공격 파괴했다. 위협을 느낀 일경들이 주재소를 버리고 구시장 쪽으로 탈주하자, 군중들을 이들을 추적하여 붙잡아 구타하는 등 부상을 입혔다. 군중들을 제지하려고 달려든 일본인도 응징했다.

4월 5일부터 사후 탄압 과정에서 송봉운이 수비대에게 부상을 당해 4월 7일 조금리 자택에서 순국했다. 면장 이인정, 남주원 등이 체포되어 서산경찰서로 끌려갔고 1차적으로 17명이 검거를 당했다. 이어 군경에 의해 200여 명 이상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서산경찰서에서 갖은 악형을 당한 후 일부 인사들은 훈방 조치되고 서장의 즉결처분으로 ‘조선태형령’에 의해 경찰서에서 4월 22일 10명, 23일 16명, 24일 28명, 25일 14명, 26일 4명으로 5일간에 72명이 태 90의 태형을 당했다. 또한 재판에 회부된 인사는 54명이다.

당시 대호지면 면장이었던 이인정 선생과 도호의숙 선생이었던 한운석 선생은 1920년 2월 7일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송재만 선생도 같은 날 상고기각으로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뤘다.

4·4 대호지·정미 만세운동은 여러 의미가 있는 만세운동이었다. 먼저 민·관이 하나되전개한 만세운동이라는 점이다. 면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결행 일에는 면장이 직접 참여 독려를 위해 연설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지휘하고 면직원들은 면민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호지면에서 정미면까지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런 독립만세운동은 지역 유생들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계층을 넘어선 다양성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있다. 지역 사숙인 도호의숙에서 함께 공부한 학생들과 선생이었던 한운석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만세운동이 지역 전체에 확산되고 면 경계를 넘는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확장되어 진행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대규모로 일어난 만큼 일제의 탄압도 극렬하여 순국 3명, 태형 88명, 불기소 65명, 면소 4명, 징역 39명 등 199명이 순국하거나 처벌을 받았으며 이에 2020년까지 총 124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인정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한운석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송재만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