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독립운동가

10월의 독립운동가

박영희(1896.12.28~(1930).)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서훈년도 :1977년

1920년 김좌진 장군 부관으로 청산리 전투 대승

1924년 대한독립군단에 가입, 항일투쟁 전개

1925년 신민부 보안사령관, 성동사관학교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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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김좌진 장군 부관으로 청산리 전투 대승

1924년 대한독립군단에 가입, 항일투쟁 전개

1925년 신민부 보안사령관, 성동사관학교 교관

1. 조선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다

박영희는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1896년 12월 28일 부여군 은산면(恩山面) 가곡리(佳谷里) 13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만주에서는 박두희(朴斗熙)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호는 정헌(靜軒), 또는 검추(劒秋)이다.

아버지 박동익은 조부와 마찬가지로 벼슬살이를 하던 관료로 1902년 5월 21일자로 내부 주사로 임명된 기록이 있다. 그는 서울 출입이 잦았고, 서울 노량진 사육신 비 앞에 집이 있었고, 구로에도 땅이 있었다. 부여에 700-800석 재산이 있는 지방 유지였는데 종들도 해방시켜 주었다고 전한다.

2. 향리에서 신명의숙 졸업과 민족의식 형성

박영희는 향리에 있던 신명의숙(信明義塾)에서 공부하였다. 신명의숙은 1908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에서 설립된 사숙으로 지역 유지들이 신학문과 전통학문을 혼합해서 가르치고자 설립한 학교였다. 따라서 신명의숙에서 박영희는 전통적인 한학과 더불어 신학문을 공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명의숙을 졸업한 박영희는 신학문을 좀 더 익히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진학연도 및 학교생활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생활기록부 등이 현재 휘문고등학교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그의 학교생활을 짐작해 보기 어렵다. 그러나 휘문의숙을 다니며 신학문에 대한 지식을 보다 축적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박영희의 학창시절 중 주목되는 부분은 신명의숙 재학 중 은사인 이세영을 만난 것이다. 박영희 집과도 가까운 곳에 살던 이세영은 당시 의병장으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박영희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다. 또한 박영희가 신흥무관학교 재학시절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3. 만주로의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졸업

이세영은 1913년 3월 함경 평안 황해도의 독립의군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지자 동년 5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독립군 양성과 후진교육을 위해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 서리에 취임하였다. 이때 박영희도 1913년경 휘문의숙 재학 중, 이세영을 따라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로 진주 김씨와 결혼하여 신행도 가기 전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여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설립되었으며, 남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동년 가을 흉작으로 인해 경학사가 해체되고, 1912년 가을에 새로운 한인 자치 기구인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동년 가을 부민단이 본부를 유하현 합니하로 이동하자 신흥무관학교 역시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이곳 강 북쪽 언덕 위에 신축한 병영사(兵營舍)를 마련하였는데 각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었다. 아울러 부설된 내무반에는 사무실·편집실·숙직실·나팔실·식당·취사장·비품실 등이 구별되어 있었고, 생도들의 성명이 부착된 총가(銃架)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1913년 5월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한 신흥무관학교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의 속성과를 병설하여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젊은 인재들을 교육시켰다.

신흥무관학교학우단규약
신흥무관학교학우단규약

신흥무관학교원들은 교가(校歌)의 제창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교가 전반의 내용은 민족혼을 지키고 이를 위해 강인한 정신과 단련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조국독립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은 학생들에게 우리가 조국을 찾고 겨레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인격을 연마하고 군사지식을 배양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아울러 정신교육에 있어서는 구국의 대의를 생명으로 한다는 목표 아래 불의에 반항하는 정신, 임무에 희생하는 정신, 체력에 필승정신, 간난에 인내하는 정신, 사물에 염결정신, 건설에 창의정신 등 6개 항목을 체득 실천하도록 하였다.

1914년 봄 거듭되는 천재로 인해 교포들의 지원이 더이상 불가능하게 되자 신흥무관학교는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교 당국에서는 춘경기에 지방토착민들의 산황지(山荒地)를 빌려, 생도들을 동원하여 경작하였으며, 이곳에서 옥수수·콩·수수 등을 수확하여 학교 유지비에 일부 보충하기도 하였다. 또한 겨울철 연료는 학생들이 학교 건너편 약천동(樂天洞)이라는 산턱에서 땔나무 감을 마련하였다. 한편 학생들은 노력 봉사로서 하계방학이 되면 교직원과 졸업생 및 재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각 지방에 흩어져 1개월씩 각자의 능력대로 노력, 수입을 만들기 위해 산으로 들로 교포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품팔이로 돈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3․1운동 이후 더욱 발전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한 박영희는 열심히 노력하여 졸업과 동시에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학도감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점을 통하여 그의 탁월한 성적과 애국심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4. 북로군정서로의 파견과 청산리전투 참여

1) 북로군정서로의 파견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만주지역에서 조직된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이 학교출신들은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의열단·광복군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 가운데 박영희는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신흥무관학교 출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애국청년들이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집안(輯安)·유하·흥경(興京)·통화 등지로 탈출하여 왔으며, 이들은 대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학교 당국에서는 합니하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확장의 시급함을 인정하고 즉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은 유하현 고산자에서 약 15리쯤 동남쪽으로 산길인 좁은 길로 들어간 산간 벽지였으며, 한족회(韓族會) 중앙총장인 이탁(李沰), 재무부장 남정섭(南廷燮) 등이 살고 있던 애국지사들의 집단촌이었다. 그러므로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이곳에 40여 칸의 광대한 병사와 수만평의 연병장을 부설하여 학생들의 교육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병사가 완공되지 못하여 일차적으로 폐업 중이던 만주인 양조장 건물 수십 간을 빌려 시급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신축교사와 수만평의 연병장, 수십장의 착정(鑿井)공사는 재무부장 남정섭의 지원하에 이루어졌다. 또한 3․1운동 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일본군 보병 중위 지청천(池靑天)과 기병 중위 김경천(金擎天), 그리고 신팔균(申八均) 등이 국내로부터 탈출해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이 학교의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는 날로 발전하였다.

박영희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북로군정서에서 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박영희와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강화린(姜化麟)·김춘식(金春植)·백종열·오상세·이운강(李雲崗)·최해(崔海) 등을 들 수 있다. 박영희 등이 훈련시킨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이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되었다.

2) 독립군양성과 청산리전투 참여

박영희는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설치한 사관연성소(소장, 김좌진)의 학도단장을 맡아 사관생도를 모집, 단기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20년 7월에는 사령관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연성소의 교육은 당시의 긴급한 필요에 응해서 6개월 과정의 속성이였으며, 과목은 정신교육·역사·군사학·술과(術科 : 병기사용법, 부대지휘 운용법)·체조 및 구령법 등이었다. 북로군정서는 두 개의 연병장에서 사관생도들에게 철저한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술과는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실탄으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모든 병사들에게 사관연성소에서 기초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1920년 9월 9일 사관연성소에서 6개월 간 엄격한 군사훈련을 닦아오던 사관연성생 298명이 마지막 수련을 끝마치고 성대한 졸업식을 가졌다. 9월 12일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약 300명의 교성대(敎成隊)를 편성했는데, 간부는 다음과 같았다. 대장 나중소(羅仲昭), 부관 최준형(崔峻衡), 중대장 이범석(李範奭), 소대장 이민화(李敏華)·김훈(金勳)·이탁(李鐸)·남익(南益) 등이었다. 사관연성소 출신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북로군정서군은 당시 만주 독립군 부대 가운데 단위 부대로서는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였다. 1920년 9월 총병력은 약 1,100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잘 훈련되고 완전 무장된 정예는 약 600명이었다. 나머지 500명은 경호병력이었다. 무기는 총기가 약 800정, 기관총 4정, 수류탄 약 2천 개 등으로 우마차 약 20량 분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중국군과 협상에 의하여 그 동안 닦아놓았던 서대파 근거지를 버리고 1920년 9월 17일~18일에 걸쳐 청산리 방면으로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북로군정서군의 근간을 이룬 여행대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청산리전투에서 닦아온 군사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일본군을 무찌르고 독립전쟁을 빛나는 승리로 장식하였다.

한편 박영희는 독립군 모집에도 기여하였다. 신한민보 1925년 10월 15일자 <북로군정서 과장 권총가지고 군자금 모집타가 징역 5년을 불복 공소>에,

함북 경성군 남산면 三봉리에 본적을 두고, 중국 간도 왕청현 춘명사 십리평에 거주하던 이경상은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의 판결을 받고 불복한 후,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는데, 그이는 6년전 3월경에 중국 간도로 건너가 한국독립운동에 활동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하다가 북로군정서 훈육부장 박영희씨의 권고로 군정서에 가입하여 8월 2일에는 동군정서 33분국 3과장에 임명되어 군정서로부터 육군사관학교에 지급하는 피복, 식물, 무기 등의 수송에 종사하다가

라고 있듯이, 이경상은 1920년 음력 3월경 북로군정서 훈육부장 박영희의 권고로 왕청현에서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였던 것이다. 그는 경신분국(警信分局) 제33분국 3과장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음력 9월경 연길현(延吉縣)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았다. 1920년 7월 4일 북로군정서 진중일지를 보면, “총재부 비서장 김성(金星)씨는 총재부로부터 본영에 와서 사령관 숙소에서 체숙하였다. 계사국장(稽査局長) 김경준(金京俊)씨는 그 국으로부터 입영하여 경신 제1 분국 제8과장 이경상 댁에 체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박영희는 적극적으로 독립군 모집 및 자금모집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3) 청산리전투 승리의 주역 독립군 양성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최강의 정예 독립군으로서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기습섬멸전으로 일본군을 능동적으로 공격해서 크게 섬멸하고 대승리를 거둔 주역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서 홍범도 연합부대와 함께 일본군 1,200명을 전사시키고 일제가 한국민족 독립군 부대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수립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과 간도 침입작전을 붕괴시켜 버렸다. 일본군은 간도침입 때 2만 5천명의 병력으로 제1단계에서는 1개월 이내에 한국 무장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에서는 다시 1개월 내에 촌락에 잠복하고 있는 비무장 독립운동 세력을 발본색원해서 간도지방의 한국민족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킬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것을 달성함으로써 국내 독립운동까지도 고립 차단시켜 이를 완전히 소멸시키려고 획책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청산리전투는 일본군의 간도침입 작전을 완전히 차단하여 일본군은 제2단계 목적은커녕 제1단계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하게 만들었으므로 만주지방의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또 이를 통하여 국내 독립운동도 우회적으로 지켜주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독립정신을 고양시켰다.

청산리 항일 전적비(길림성 화룡시 청산리)
청산리 항일 전적비(길림성 화룡시 청산리)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북로군정서 독립군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사령관 김좌진, 참모부관 나중소, 부관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김민화(金敏華)·김훈(金勳)·백종열·한건원(韓建源), 대대장 서리 홍충희(洪忠熹), 제1중대장 서리 강화린, 제2중대장 서리 홍충희(洪忠熹),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 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제1중대 제1소대장 신희경(申熙慶), 제1중대 제2소대장 강승경(姜承慶), 제2중대 제1소대장 채춘(蔡春), 제2중대 제2소대장 김명하(金明河), 제3중대 제1소대장 이허구(李栩求), 제3중대 제2소대장 정면수(鄭冕洙), 제4중대 제1소대장 김동섭(金東燮), 제4중대 제2소대장 이운강(李雲岡), 기관총대 제1소대장 김덕선(金德善), 기관총대 제2소대장 최인걸(崔麟杰), 제1중대 특무정사 나상원(羅尙元), 제3중대 특무정사 권중행(權重行)이었다. 이때 박영희 역시 부관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5. 청산리 대첩 이후 무장투쟁 활동

1) 대한독립군단에서의 활동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청산리대첩 후 북만주로 이동하여 1920년 12월경 밀산에 도착했다가 치타정부의 군사원조 약속을 받고 1921년 1월 흑룡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갔다.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단체들은 이만에서 1921년 3월 그간 모인 독립군 부대들과 병사들 3천 여명을 모아서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여 군사통일을 실현하였다. 그들은 1921년 4월 1일 이만에서 다시 36개 대소 독립군 단체의 수뇌들이 모여 독립군대회를 개최하고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이름을 대한독립군단이라고 바꿈과 동시에 체제를 정비하였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사령관 겸 참모부장은 김좌진, 참모는 이장녕·나중소가 맡은 것으로 보아 대한독립군단은 북로군정서가 핵심이 되어 다른 독립군부대들을 통합한 것을 알 수 있다.

박영희도 청산리대첩 이후에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러시아영토로 이동하였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2년에는 북로군정서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24년 1월에는 총재 이범윤(李範允)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단에 가입, 김좌진·신일헌(申日憲)·한함산(韓咸山)·최대갑(崔大甲)·조생갑(趙生甲)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강화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북로군정서 진영을 재정비 조직하게 됨에 따라 행정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아울러 1924년 6월에는 대한독립군단 부관장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1925년 2월에는 3.1운동 6주년을 기념하여 길림(吉林)에서 등사판의 선포문을 작성하여 국내 국민협회(國民協會) 등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 선언문은 군사교육의 확립, 민중생활의 근본인 식산흥업의 촉진, 민지(民志)향상을 위한 문화보급을 강조하고 있다.

2) 『배달공론』을 통한 군사지식 보급

박영희는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군사전문가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양반자제로 한문학에 밝았으며 필재도 있었다. 그의 군사학에 관련된 전문성은 중국 상해에서 1923년 9월 1일자로 창간된 국한문본 잡지 『배달공론』 창간호(1923.9.1.) 및 2호(1923.10.1.) 에 2차례에 걸쳐 <군사학강의>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에서 잘 알 수 있다.

배달공론은 중국 상해에서 1923년 9월 1일자로 창간된 국한문본 잡지이다. 처음 월간으로 출발했으나, 간기는 지켜지지 않았다. 현재 1호와 2호, 그리고 4호만 남아있다. 그 가운데 2호는 창간호 한 달 뒤인 1923년 10월 1일이지만, 4호는 1924년 4월 10일자에 발간되었다. 실제 몇 호까지 발간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박영희는 만주 독립군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동선(中東線) 소수분(小綏芬) 지역에서 학술강습소를 열어 군사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주필 김인해(金仁海)는 박영희의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통해 독립운동을 고취하고자 했으며 박영희는 잡지 게재를 통해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하고자 했다. 이런 서로의 이해가 맞물려 군사학강의가 배달공론에 연재되었다.

6. 신민부에서의 활동과 순국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1925년 1월 목릉현(穆陵縣)에 모여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한 결과, 동년 3월 10일에 영안현(寧安縣) 영안성 내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때 참가한 각 단체와 지역 대표는 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정서·북만지역의 민선대표(民選代表) 및 국내 단체의 대표 등으로 알려져 있다.

신민부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중동선교육회 및 16개 지역의 민선대표·10개의 국내 단체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이때 박영희는 대한독립군단 대표로서 김좌진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독립군단은 1920년 말에 밀산에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참변 이후 북만지역으로 복귀하여 1922년 8월에 재조직한 단체였다. 신민부에서 김좌진은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고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박영희는 보안사령관을 맡아 김좌진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였다.

신민부는 1925년 10월 제1회 총회에서 관할 구역 내에 거주하는 이주한인 가운데 18~38세의 남자들로 반을 편성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는 한편 군사강습소를 두어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소유한 인사들 양성 계획을 세웠다. 신민부 길림성(吉林省)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고 6개월 과정의 속성 군사교육을 진행하였다. 당시 성동사관학교 교장에는 김혁(金赫), 부교장 김좌진, 박영희는 교관으로서 교관 오상세·백종열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성동사관학교는 전후 500여 명 사관생을 양성하면서 신민부 무력의 근간을 이루었다. 신민부는 성동사관학교 출신자와 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정서·민병(民兵)들 중 일부를 흡수하여 정규군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약 530명의 병력으로서 5개 보안대와 그 통제를 받는 별동대를 두었다.

한편 신민부가 추구했던 무장활동의 기본목표는 무장투쟁을 통하여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해야 가능한 일이었으나 당시 530여명의 군인을 보유한 신민부의 무장수준으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국내진입을 수행하기 위한 예비공작을 우선 추진하였고 1927년 8월에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과 보안사령관 박영희의 주도로 공작대 파견이 시작되었다. 먼저 이중삼 등 특수공작대는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 지역의 작전지도의 작성과 일본 주재소의 위치 등을 파악하였다. 한편 신민부에서는 국내에 사람을 보내 조선 총독인 재등실(齋藤實 ; 사이토오 마코토)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1925년 3월에 김좌진은 강모(姜某) 등 신민부원에게 수십 개의 폭탄과 권총을 제공하고 총독의 암살을 지령하였다.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민부가 만주지역의 활동에만 집착하지 않고 국내에까지 침투하여 총독을 암살하고자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또한 박영희는 북만 지역의 친일 한국인의 암살에도 주력하였다. 당시 일본은 장춘(長春), 대련(大連) 사이는 물론, 국자가(局子街)·용정·하얼빈·훈춘·두도구(頭道溝) 등지에 영사관 및 그 분관(分館)을 설치하였는데 독립운동단체의 정보를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타 지역에서는 보민회·조선인민회·권농회·시천교(侍天敎)·청림교(靑林敎) 및 제우교(齊愚敎) 등의 친일단체를 동원하였다. 이렇게 독립군의 사정을 전달하고 잡는데 협력을 한 친일협력 단체장들을 주로 암살대상으로 삼았고 결과가 해림 지역의 초대 조선인민회의 회장인 배두산(裵斗山)의 암살이었다.

한편 박영희는 김좌진의 밀명으로 러시아 혁명군과 교섭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김좌진은 1926년 항일운동의 군자금을 협조받기 위해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군사부장 겸 보안사령관인 박영희를 러시아 제3국제공산당 극동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하였다. 1926년 4월 20일 <선비단 신민부와 공산당의 제휴설에 관한 건>에,

신민부의 박두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제하면서 김해창(金海昌), 주영진(朱榮鎭) 등과 함께 러시아 공산당에 연락을 취하면서 활동 중이다.

라고도 있다. 박영희는 러시아 공산당과 접촉을 취하던 중, 1927년 러시아 첩보기관에 체포되어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