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독립운동가

07월의 독립운동가

강혜원(1885.11.21~1982.05.31. )

훈격 :건국훈장 애국장서훈년도 :1995년

1919년 신한부인회 결성,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자금 후원

1940년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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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부인회를 조직했고, 이후 미 본토로 이주하여 각지에 설립된 부인운동단체를 통합하고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했다. 애국단 초대 단장을 역임하며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이끌며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의 개척자’로 일컬어졌다. 바느질 등으로 번 돈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 대한인국민회 등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했다. 시간당 15센트를 벌면서도 자신과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후원한 독립운동자금은 총 4만 6천여 달러에 이르렀다. 

강혜원 선생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주하여 1913년 4월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부인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올케 강원신을 비롯하여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신한부인인회의 설립목적은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 납부 등이었다. 

  그리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인회를 통합하여 1919년 8월 2일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립되었고 선생은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2월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1921년 4월 28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들과 함께 「여자애국단 경고서」를 발표하고 단비(團費) 수납을 촉구했다. 선생은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선생을 비롯한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했다.

  이후에도 부인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며 1940년 1월, 1941년 2월, 1941년 12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단장으로 선임되어 3년간 활동했다. 

  이처럼 선생은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해방 이후에도 재미한인전후구제회(在美韓人戰後救濟會)와 함께 본국에 구제품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선생의 가족 5명은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어머니 황마리아는 2017년 애족장, 남편 김성권은 2002년 애족장, 동생 강영승은 2016년 애국장, 올케 강원신은 1995년 애족장을 받았다. 

  선생은 1982년 5월 31일 별세했으며,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Rosedale) 공동묘지에 계시다가 2016년에 남편과 함께 유해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